● 양승국  서울대  교수

조명희와 김우진

절친 김우진, 와세다 대학 영문학 수재면서
한문 구사도 뛰어나 ‘문예의 길’ 함께 걸어  
1920년 동경유학 중 함께 극예술협회 조직
가난한 유학생 삶 다룬 포석 ‘김영일의 사’
한국 최초 공연된 창작극… 근대극 ‘기폭제’
조명희 시집 ‘봄 잔디밭 위에’ 영감 받아
마지막 유작 희곡 ‘산돼지’에 인용하기도
1926년 8월 현해탄 투신정사로 삶 마감하자
포석 “생각과 감정이 몹시 착란(錯亂)” 애통  

a포석 조명희 선생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돼 왔습니다. 오늘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포석의 문학활동과 생애를 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김우진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갔는데 조명희 연구에서 김우진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된 편이 아니지만 많은 편지가 남아 있고 일기, 회고에도 김우진이 많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포석 조명희 선생 같은 경우 문학 데뷔나 전개과정이 매우 특별합니다. 한국 문단의 데뷔작이 희곡이고 이 한 작품으로 근대 연극사에 큰 획을 그은 분입니다. 그렇다면 극작가로서 꾸준히 활동하고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어야 하지만 1923년도에 ‘파사’라는 역사극을 개벽지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희곡 창작은 끝났습니다. 연도를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그 사이 주로 시를 쓰고 1924년 ‘봄 잔디밭 위에’를 발표하고 1927년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획을 긋는 ‘낙동강’과 같은 의미 있는 작품들을 발표한 뒤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 
1920년대에 창작 희곡이 공연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윤백남이라는 작가가 신파극, 근대연극 등 몇 편의 창작 작품을 발표했지만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일의 사’라는 작품은 최초로 공연된 창작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1920년 봄 동경에서 김우진, 조명희 등은 극예술연구 단체 ‘극예술협회’를 조직했습니다. 이 단체는 당시 동경 유학생들과 동포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요청으로 극단을 조직해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한 뒤 전국 순회공연을 펼쳤습니다. 이때 공연된 작품은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 홍난파 원작의 ‘최후의 악수’, 김우진 번역의 ‘찬란한 문’ 등이었습니다. 이 중 ‘김영일의 사’는 창작 희곡으로서 공연되고 발표됐다는 점, 그 영향으로 본격적인 근대극 운동이 전개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훗날 임화라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론가는 조선근대발달 과정에서 다분히 프롤레타리아적 시각을 갖고 있어 1920년대 학생운동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을 공연한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호평했습니다.
오늘날 희곡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1920년대의 ‘김영일의 사’라는 작품은 간단하고 시시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희곡은 그 당시 공연됐을 때 관객의 수준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작은 기사 안에 ‘김영일의 사’가 주목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학생들의 실상을 보여주고 그 실상이 오늘 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 이상의 굉장한 사건으로 다가갔기 때문입니다. 이 공연을 관람한 것은 당시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런 수준 높은 관객들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담고 있는 학생들의 공연에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 활동이 기폭제가 돼 학생들은 방학이면 고향에 돌아가 극단을 조직하고 연극제를 열게 됐습니다.
1920년대에는 방학때마다 이런 연극들이 자리잡게 돼 신파극을 뒤엎고 새 근대극이 주를 이루게 됐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기폭제가 포석의 ‘김영일의 사’입니다. 하지만 포석은 이후 희곡을 쓰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작품이 있었지만 공연되지 않았고 주목도 받지 못했습니다.
1926년 8월 김우진이 윤심덕과 현해탄에 투신정사한 사건이 알려졌고 길게는 10년, 짧게는 1년간 거의 매일 같이 이 사건이 회자됐습니다.
1년 정도 지났을 때 조명희는 “작년 8월 4일에 수산(水山)이 죽었다. 그가 죽은 뒤에 세상에서는 그의 죽음과 그의 생전(生前) 일에 대하여 멋대로 지껄이고 멋대로 판단(判斷)을 내린다. 더구나 무근(無根)한 사실(事實)을 함부로 과장(誇張)하여 내어 놓는 신문 잡지의 기사란 것은 차마 볼 수가 없을 만하였다. 그런 지도 벌써 죽은 지 1기년(朞年)이나 되었다. 그렇건만 나는 이때껏 그의 일에 대하여 줄곧 침묵(沈默)만 지켜왔었다. 그것은 그가 죽을 그때에도 나의 생각과 감정(感情)이 몹시 착란(錯亂)도 하고 변화(變化)도 잦았으므로 쉽사리 얼른 말하기가 싫었던 까닭이요, 그 뒤에는 때가 지나고 보니 뒤늦게 말하기도 어중되었던 까닭이다. 새삼스러운 말이다마는 그는 왜 죽었나? 나는 그의 죽음이란 일에 이르러서는 말하지 않겠다. 세상 사람 판단 그대로 맡겨두련다. 또는 그의 생전 일에 대하여 세상에서 떠도는 올곧지 않은 풍설(風說)도 일일이 다 변명(辯明)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한다.”와 같이 회상했습니다. 마치 김우진의 죽음에 다른 이유가 있고, 자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 말했습니다. 이러한 회고는 조명희와 김우진의 관계가 특히 남다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조명희는 김우진을 문예의 길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김우진은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최고의 수재로 영문학을 공부하면서도 한문 구사가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조명희와도 교류가 가능하지 않았겠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받고 김우진은 굉장히 감동해 감격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명희를 블레이크나 괴테, 와일드와 다름없는 천재라고 추켜올리는 편지글을 보면 그가 평소 조명희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김우진의 마지막 유작인 ‘산돼지’에는 조명희의 ‘봄 잔디 밭 위에’라는 시가 직접 인용돼 있습니다.
포석은 김우진이 1924년 귀국해 목포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기 위해 칩거하자 이를 두고 나무라고 꾸짖는 언사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명희는 자신의 시집을 보내 주며 집에 있던 김우진에게 비난과 격력의 글을 동봉했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김우진은 이러한 글을 받고 자신을 다시금 추스릴 수 있었습니다. 김우진이 집에서 뛰쳐나오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또 둘의 편지를 보면 조선을 떠나 일본에 갔다가 최종적으로는 독일에 가자는 약속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우진은 ‘봄 잔디밭 위에’가 인용 돼 있는 ‘산돼지’라는 희곡을 조명희에게 보내며 ‘이 작품이야 말로 정말 자신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작품이 실질적인 김우진의 대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우진이 집을 뛰쳐나와 일본으로 가게 된 그 과정에서 조명희의 역할이 컸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자극을 줬으며 일본에서 연극 비평을 하며 ‘산돼지’라는 작품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조명희의 ‘봄 잔디밭 위에’인 것입니다.
김우진의 이 작품은 ‘조선지광’에 3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조명희로서는 이 작품이 김우진의 유고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1927년이 돼 포석은 ‘낙동강’을 발표하고 1928년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 독일로 가자는 김우진과의 약속을 혼자서라도 지키겠다는 결심이 아니었나 추정해봅니다.
만약 김우진이 살아 있었더라면 같이 무엇인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조명희는 김우진이 없는 조선을 떠나 러시아에 갔다가 결국 다른 운명을 맞게 됩니다.

 

 

● 박진숙  충북대  교수
조명희 문학세계와 이념들
예술창작에 있어 허황되지 않은 과장 강조
사상·이념보다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
소설 ‘낙동강’걾?消굼瞼??일제토지조사로 
식민지 시대 핍박받는 농민의 고충 묘사
사실 근거해 시대현실 포착 생동감 표현 
포석은 민족주의 위해 ‘사회주의’ 선택
시대 비판적인 작품 탄압으로 러시아 망명 
그곳 예술창작 주제는 모두 사회주의 체제
여전히 작품검열… 만신창이 현실에 후회도

 
조명희를 다시 읽는 일은 이것저것 새롭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1988년은 월북작가 해금된 해입니다. 그때서야 망명작가인 조명희 선생의 작품을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며 대학교 강의, 대학원 답사 등이 생각났고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심경이 교차됐습니다.
1988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사회는 많이 변화했습니다. 그 변화와 아울러 저의 시각도 변화했습니다. 소설 ‘낙동강’ 등을 읽었을 때의 당시 심경과 여러 안타까움, 다시 어떤 문학적 행방을 잡을 것인가 고민한 일 등이 떠올랐습니다. 고민했던 것 중 하나는 이재준과 조명희를 조명해 보고 싶었지만 이미 선행된 연구였습니다. 조명희를 다시 읽으니 그가 민족주의 문학자, 인도주의자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조명희 평전을 읽으며 백석의 시 두편이 떠올랐습니다.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허준’이라는 작품입니다. 만주행을 택했던 백석과 러시아 행을 택한 조명희를 나란히 놓을 순 없지만 조명희의 내면을 백석의 이 시 두편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백석의 동화시와 조명희의 동시, 동요를 접목하면 좋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다음은 조명희의 문학관입니다. 이명재 ‘조명희’ 평전에서는 자료에도 나와 있듯 “조명희는 오늘만은 단단히 각오라도 한 듯 주위에 개의치 않고 조용하되 결연하게 말을 계속했다. 제출한 원고를 돌려주지 않는 일은 다반사이고 발표 작품마저 검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조명희는 소련에 망명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당의 지시와 이른바 사회주의 리얼리즘 요건에 맞추다 보니 문학작품이 생기가 없고 도식적이라서 도무지 감동마저 사라졌다는 하소연이었다. 모두가 사회주의 체제 찬양 아니면 스탈린 같은 독재자에 대한 송가들뿐이니 답답하기 그지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근래에는 비교적 검열에서 자유로운 동화·동시·동요, 그렇지 않으면 동화극 같은 것을 통해서 원초적인 예술을 구현하려고 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명희는 조선에서 시대 비판적인 작품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해 러시아로 망명했음에도 여전히 작품 을 검열 받는 만신창이의 현실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조명희의 사상적 지향점이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가진 이상주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양 교수님께서 김 우진과 함께 가고자 했던 곳이 독일이며 러시아 행을 택한 조명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겠나 추정하셨는데 저도 거기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포석은 문학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어떤 곳을 가고자 했던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낙동강’이라는 소설 바탕에서 주목할 점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진천 출신임에도 경상도 낙동강 지역을 직접 취재하며 썼다는 것입니다. 직접 취재해 농민이 궁핍하게 된 현실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소설에 구현했습니다. 사실에 근거를 둔 그의 창작방법은 편지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시 표현에서도 사실에 근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조명희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예술창작에는 어느 정도 과장을 하여 감정을 높이는 등 예술적 효과를 의도할 수 있으나 과장이 너무 허황돼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포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념보다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예술적 탐구이고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었고 예술은 시대 현실을 포착해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음은 일제의 지배정책과 조명희의 현실인식 부분입니다. 조명희의 소설에 드러난 당시 통치정책과 조선의 현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는 선행된 연구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 ‘낙동강’을 통해 토지조사 사업 등 일제의 정책과 관련한 점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이 감옥에 가게 된 사건 중 하나가 ‘갈밭사건’입니다. 거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자료에도 나와 있듯 “이 촌민의 무지로 말미암아 십년 전에 국유지로 편입이 되었다가 일본사람 가등이란 자에게 국유미간지 철일이라는 명의로 넘어가고 말았다”라고 돼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일제가 기도했던 것은 토지제도의 근대화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간지와 공유지가 문제가 됐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를 국유지화 해 대지주가 돼 식민지지주제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갈밭은 이 미간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갈을 베어 생계를 이어나갔던 농민들이 그마저도 하지 못하게 된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농민들이 가난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현실인식이 반영돼 있는 부분입니다. 토지조사사업의 혜택으로 생겨난 ‘동척창고’에 대한 묘사가 나오고 소작농인 사람들이 흩어지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명희의 소설을 살펴보면 민족이 흩어지게 된 과정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 ‘춘선이’ 속에서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어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이유가 소작료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동척의 소작료가 반이상이며 이 과정을 통해 일본 대자본가들이 조선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있어 무산계급뿐 아니라 지주와도 힘을 합쳐서 일을 해야지 간도 같은 데로 떠나서는 안된다고 설득하는 인물인 ‘응칠’이 나옵니다. ‘춘선이’는 떠나려다 열차에서 4~5년 전 이곳을 떠났던 친구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고 가지않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떠나는 농민들과 돌아오는 농민들을 묘사함으로써 일제 식민지 시대 땅 없는 농민은 어디에서나 살기 힘들다는 현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토지조사사업과 기미년 3.1운동과의 관련성입니다. 3.1운동의 원인 중 하나가 토지조사사업인 것으로 ‘낙동강’에서는 확인되는데 이것이 신빙성이 있느냐 하고 한국사 전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그것이 일반적 의견이긴 하지만 정확한 사료가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저는 사료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 출발점이 문학작품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생활기록의 단편’에서 말한 ‘동지에 대한 환멸’이나 소설 ‘R군에게’ 등에서 나타나는 아나키즘 단체 흑도회와의 관계, ‘마음을 갈아먹는 사람’에서 ‘한참 동안 무의식’, ‘한참 무의식’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무의식적으로’라는 표현이 소설에서 자주 나오고 있는데 김우진의 표현주의 희곡과 연결해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제목을 ‘조명희 문학세계와 이념들’이라고 붙인 이유는 포석이 당대 현실의 구체적 포착을 주로 한 민족주의 문학자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포석은 소설 ‘낙동강’에서 “반도에 한 괴물이 배회한다. 그 괴물은 곧 사회주의다. 청년운동, 농민운동, 형평운동, 노동운동, 여성운동….”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박성운이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전환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독자들의 눈에 이것은 선언일 뿐 실제 사회주의자로 전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습니다. 조명희 선생은 리얼리즘 문학자, 민족주의 문학자입니다만 저는 사회주의적 애국자라는 말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사회주의적 애국자라는 말은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민족주의를 위해 사회주의를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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