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청양군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전시물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면암 최익현 선생의 대마도 유배도와 영정 그림을 입수하게 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대마도 유배도(63.5㎝×143.5㎝)는 면암선생 일행이 숭례문을 나올 때부터 대마도에 도착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일본인이 끄는 인력거를 탄 면암 선생 뒤에 장남 영조, 차남 영학을 비롯해 임병찬 등 10명이 뒤따르고 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배에 타는 과정 등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으니「대마유배과정도」라 부르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청양군이 추정하고 있는 이 그림의 제작에 대하여 1930-1940년대 석지 채용신이 운영하던 미술서화공방에서 그려졌고 그 시기는 1932년 최익현의 일성록이 발간되던 해나 그 이후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채용신의 서화공방에 초점을 너무 맞춘 것 아닌가 싶다.
 일찍이 채용신이 그린 면암 최익현 선생의 초상(136×63.5cm)은 1905년 비단 한 폭에 채색되었으며 보물15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이다. 면암 초상화의 제작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이다. 면암은 을사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며 조약의 폐기를 주장한다. 그리고 항일운동을 펴자며 8도에 포고문을 발표하고 납세 거부, 일본상품 불매, 철도 안타기 등의 운동을 벌인다. 채용신은 이 결정적인 시기에 면암의 초상화를 그린다.
면암은 1906년 2월, 전북 태인으로 임병찬을 찾아간다.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서다. 3월 15일 판서 이용원, 김학진, 참판 이성열, 이남규 등에게 동참을 요구했으나 소식이 없었다. 호남 고을마다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하자는 격문을 보내 양심적인 지사들의 동참을 촉구하였고 의병의 군율, 의복제도, 규칙 등을 제정한 후 의병활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곧 관군에 의해 제압되고 1906년 6월 14일 최익현과 임병찬 등 13인의 의사들이 체포 되면서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최익현 임병찬 등은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되었다가 1906년 8월 28일  대마도 이즈하라 팔번궁 앞 위수영(衛戍營)에 감금되었다.
평소 최익현을 흠모하던 채용신 선생은 이 슬픈 의병유배 감금사건을 그냥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면암의 대마 유배과정도 제작 시기는 1906년 8월 28일 대마도로 호송된 직후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채용신은 조선말기 화가로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 고종의 어진을 그리기도 하였다.
 면암은 일본 측이 면암에게 단발까지 강요당하자, 물 한모금도 마시지 않겠다며 단식투쟁을 시작하였다. 단발강요가 철회되고 고종의 만류로 단식을 중지되었으나 망국의 통한과 감옥생활의 고통은 선생의 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결국 1907년 1월 1일 대마도의 감방 안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수선사에서 장례를 마치고 9월4일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74세의 의병장 최익현의 죽음을 함께하려는 슬픈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논산근 노성면 국도변에 선생을 모시니 참배객이 또한 인산인해였다. 일제는 같은 해에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4-1번지로 옮겼다. 현재의 묘소 옆에는 당시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 중인 전톤가옥 3채가 “ㄷ"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예산군에서는 예산을 확보하여 이 전통가옥을 면암 최익현선생 기념관으로 꾸미면 참으로 좋을 것 같다..
이석화 청양군수는 "이번 그림이 새롭게 드러남에 따라 학술대회 등을 개최해 면암 선생의 일대기를 재정립할 계획"이라고 의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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