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길 <소설가>

 

30여년도 훨씬 전에 캐나다로 이민 간 후 작고했지만 소년시절부터 내가 ‘장 형(장병두 선배)’이라 부르며 따르던 선배가 있었다. 소극적인 나와는 반대로 그는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동네에서 수재로 알려질 만큼 공부도 잘 했고 매사에 저돌적이었다. 또 한 사람 그와 짝꿍이던 ‘이 선배도 역시 ‘장 형’과 쌍벽을 이룰 만한 터여서 둘이 어울리면 운동경기나 놀이에서나 거침없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 둘은 몇 년 후배인 우리 또래의 우상이었다.

그런 장 형에게 또 다른 일면이 있었다. 고교 때부터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거기서 얻은 어설픈(그러나 내게는 대단했던)문학지식을 오근자근 들려주는 자상함도 있었다.

교과서외에 참고서 한 권 못 살만큼 가난했던 나는, 장형의 책꽂이에 있던 학생잡지 ‘학원(學園)’을 비롯해서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무정’이나 ‘흙’ 같은 문학서적을 빌려다 읽었다. 장 형이 고교 졸업 후, 요즘 말로 ‘알바’를 하면서 대학에 다닐 때는 ‘현대문학(現代文學)’이나 황순원, 김동리, 김동인 등의 단편집을 빌려다 봤다. 장형의 탐독서 진화에 따라 내 독서도 진화(?)를 했던 셈인데, 그때의 내 독해력은 주제(主題)파악도 제대로 못할 만큼 수준미달이었지만 그래도 그 무렵에 함께 읽던 ‘알센 루팡’이나 ‘황금박쥐’같은 책들 보다는 공들여 읽었었다. 책을 돌려 줄 때 장 형이 꼭 한두 마디씩 던지는 질문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가 훗날 법관이나 작가가 되리라 믿었었다. 초·중학교시절 줄반장을 했고 당시‘충북의 하버드’라던 청주시내 명문 ‘C고’를 졸업한 수재로, 법과대학에 재학 중이면서도 해박한(?) 문학상식을 지닌 터였으므로 내 나름의 예상이 그리 허황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내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장 형도 대학을 졸업했지만 시골 근무지에서 가끔 올라와 만나는 ‘장 형’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만나면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야, 술 한 잔 사라.’ 그게 인사였고 그가토해 내는 말들은 예전의 ‘문학 열강’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울분, 자포자기, 내 말을 트집 잡아 분노를 터트리는 고약한(?)성격으로 변했었다.

“촌구석에서 선생질 하는 놈이 세상을 알아? 네가 뭘 알아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해?”

‘왜 옛날의 장 형 모습을 보여주지 않느냐’는 내 공박에 그가 그렇게 흥분하는 까닭을 나는 알 수 없었다. 이민 가기 전 마지막 만났을 때, 그는 취하지 않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안 선생, 나하고 술 먹어도 괜찮아?” 왜냐고 묻자 그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알잖아. 내 아버님이 일제 때 순사(巡査)였고, 광복 후엔 보도연맹이었다는 거.”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6.25발발과 함께 부친을 잃고 어렵게 살았던 것도. 그러나 그게 왜 장 형을 그렇게 망가뜨리는 건지를, 그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었다.

결국 장형은 연좌제(連坐制)란 덫에 걸려 좌절 했던 게 아닌가? 공직진출은 막히고, 몸과 마음에 맞지 않아도 어렵사리 잡은 직장도 얼마 못가 내놓아야하고.... 수재에 어렵게 마친 대학학력도 무용지물이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연명을 위한 허드렛일뿐이었으리라. 차라리 우둔하고 배우지 않고 꿈이 없었더라면 그의 인생이 분노와 좌절로 방황하지는 않았을 걸.

수재요, 법학도요, 문학도였던 그가 나라가 끌어안고 있는 비극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덫, 8차 개헌(1980.8)으로 연좌제는 금지 됐으나 지금 이 땅, 이 세상에 그는 없다. 그러나 그는 어린 날의 내 우상이었고 내게 문학의 동기를 심어준 유일한 스승이요, 잊을 수 없는 선배였다. ‘장 형’, 그는 지금 타국의 찬 땅에 누워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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