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 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어느 분야든, 지역이든 원로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분야에 오래 종사해 나이와 공로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원로라 부르고 그를 어른으로 대우한다. 그것이 우리의 미덕이요, 후배로서 당연한 일로 받아 들여왔다.
그런데 세상이 각박한 탓인지 우리 주변에서 내로라하는 원로를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이 돼버렸다. 청주만을 놓고 보자. 과거엔 남궁윤 박사 등 존경받는 몇몇 어른들이 있어 지역을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이 분들이 세상을 떠난 뒤 우리 지역에서 스스로 원로라고 명함을 내밀거나, 주위에서 원로로 대우해 주는 어른이 몇 명이나 있는가. 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원로들이 있어 대우받아 온 분야가 있어 다행이다. 체육이다.
충북 체육은 1970년대 소년체전 7연패를 기록, 전무후무한 위업을 일궈냈다. 당시 7연패 달성 주역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각 경기단체 전무이사들이다. 지금은 나이가 70~80대로 ‘7·7회(70년대 7회 우승)’라는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다지고 훈련장과 전국체전, 소년체전 경기장을 찾아 후배들을 격려하는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또 충북체육 발전을 위해 쓴소리, 단소리를 마다 않는 열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후배 체육인이나 체육관계자들로부터 ‘원로’ 대우를 받는다. 후배들은 이들 원로들을 운동 대선배로 대우해 주는 것을 당연해 하고 기쁨으로 받아 들인다. 충북체육의 근간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지주여서 그렇다.
그런데 원로체육인이 ‘사고’를 쳤다. 그것도 단독 사고가 아니라 원로체육인 동료와 후배 체육인들을 싸잡아 욕보이게 하는 대형사고를 쳤다.
충북도교육청과 충북도체육회는 매년 전국체전과 소년체전 출전을 앞두고 이들 원로체육인들을 초청해 간단한 식사대접을 해 왔다. 후배 선수와 지도자들을 격려하고 충북체육 발전을 염원하는 원로에 대한 예우 차원이다.
이달 초 충남 아산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앞두고도 이들에 대한 예우자리가 마련됐다. 지난 9월29일 충북도교육청은 원로체육인 30여명을 시내 모 중국집으로 초청해 저녁을 대접했다. 이날은 부정청탁 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 바로 다음날이어서 초청하는 쪽이나 초청받는 쪽 모두가 신경이 곤두섰던 때다.
충북은 종합순위 8위를 목표로 했고 도교육청은 고등부 목표를 4위로 잡았다. 고등부 성적에 따라 충북의 종합순위가 달려 있어 교육청 어깨는 그만큼 무거웠다.
한 원로체육인은 이렇게 말했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식사를 모시겠다는 제자 장학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년체전 7연패 당시 전무이사였던 원로들을 모시고 ‘기(氣)’를 받아야겠다면서. 그래서 김영란 법엔 괜찮겠느냐, 일선 교장들이 체육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게 하려면 교육감이 나오셔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장학사는 장학사 4명이 갹출해 짜장면 한 그릇 모시는 데... (김영란법에 대해) 다 알아봤다고 하더라. 헤드테이블에 교육감, 선배 4명과 함께 둘러 앉아 옛날 소년체전 얘기를 주로 하며 덕담을 나누었다. 선거얘기? 그런 말 나오지도 않았고 그런 얘기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김병우 충북도교육감이 최근 김영란 법과 사전선거운동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이 자리에서 선거와 관련한 발언을 했고 식사비는 사실상 교육감이 지불했다며 누군가가 고발한 것이다.
이같은 소식이 전해지자 참석했던 원로체육인들의 반응은 격앙 그 자체였다. 다른 한 참석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진보성향의 김 교육감을 음해하려는 세력 한두명이 없는 말을 만든 것 같은데 만일 문제가 된다면 체육인들이 나서 누가 그랬는지 색출해 내겠다”고 발끈했다.
당사자인 김 교육감은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교육감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세력을 지목했다. 그러면서 빼앗긴 것을 되찾겠다면 음해에 집착하지 말고 비전을 제시하라고 응수했다.
참석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꾸라지가 판을 깬 꼴이다. 문제는 이 미꾸라지 때문에 순수한 원로체육인들의 설 땅이 도매금으로 좁아지고 그 영향이 후배 체육인들에까지 미친다는 거다. 대우 차원에서 관행적으로 해 온 식사를 이렇게 왜곡한다면 누가 체육인들을 상대로 밥 한끼 먹으려 할 거며, 누가 그들을 상대하려 할 것인가. 일각에선 체육에 관심 있는 교육감을 골탕먹여 관심을 끊게 하려는 고단수 음모라는 해석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사건은 체육인들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고 본다. 체육인들이 명예를 걸고 자존심과 신뢰 회복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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