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호(중부대 교수)

▲ 최태호(중부대 교수)

어느 날 아침 카카오 톡으로 재미있는 문자가 왔다. 철학을 전공한 벗으로부터 <바보와 똘똘이는 둘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온 것인데 저자로부터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글을 쓴다. 그 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바보 소리를 듣는 아이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이 바보를 놀리기 위해, 50원짜리와 100원짜리 동전을 놓고 하나만 집어가라고 한다. 그러면 이 아이는 항상 50원짜리 동전만 집어 들었다. 동네 아이들은 아이를 놀려댔고, 동네 어른들은 이 바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얘야! 50원짜리보다는 100원짜리가 더 좋은 돈이란다. 100원짜리로 더 좋은 것을 살 수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100원짜리 동전을 집으렴.” 동네 어른의 말에 바보는 웃으며 말했다. “네,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100원짜리 동전을 집으면 동네 아이들이 다시는 그런 장난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저는 돈을 벌지 못하잖아요.”
 이번에는 오래 전에 동료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소설을 전공한 분으로 구수하게 좌중을 휘어잡을 줄 아는 분이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바보의 이야기라 그 때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 어느 시골 주막에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주막에는 아주 값이 비싼 도자기가 하나 있었다. 막사발로 볼품이 없었지만 상당히 오래 된 골동품으로 가격이 엄청 비싼 것이었다. 이 주막집 주인은 그걸 고양이 밥그릇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객이 그 막사발을 알아보고는 한 가지 꾀를 내었다. 주인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쥔장! 저 고양이가 참 잘 생겼는데 나한테 파시구려. 내가 후히 값을 쳐 드리리다.” 주인은 “얼마나 주시려구요?” 나그네는 “시세의 두 배로 드리리다.”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고양이를 시세보다 비싼 값으로 팔았다. 나그네는 다시 말을 하였다. “고양이는 샀는데, 이왕이면 저 막사발도 선물로 주시구랴. 고양이가 좋아할 것 같으니 그냥 덤으로 주시구랴.”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막집 주인은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 막사발 덕분에 고양이를 수도 없이 팔았는데, 그냥 가시지요.”라고 하니 나그네는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갔다고 한다.

 이 바보 이야기 두 편을 읽다 보면 내가 바보인지 똘똘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바보처럼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살았지만 돌아보면 똘똘이처럼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온 날들이 바보를 놀리던 동네 아이나 고양이를 빙자해서 골동품을 얻으려는 나그네 시절은 아니었던가 하고 반성도 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바보가 될 수도 있고, 똘똘이도 될 수 있다. 동네 아이들은 바보를 놀리면서 자기가 가장 똑똑한 아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보는 똘똘이들보다 똑똑한 아이였다. 막사발을 개밥그릇으로 쓴 주막집 주인도 바보인 것 같지만 골동품상보다 똘똘이였다. 누가 바보이고 누가 똘똘이인지 나도 모르겠다. 평생 똘똘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왔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사실 이 세상에서 바보가 되거나 똘똘이가 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모두가 지나치게 똘똘해서 서로 물고 뜯으며 살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을 상처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아지들이 먹을 것을 가지고 싸우면 바라보는 사람은 빙그레 웃는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싸운다고 생각한다. 송충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렬로 어디론가 부지런히 가다가 중간에 엉키면 뒤범벅이 되어 대열이 망가진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참으로 미련한 놈들이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쉽게 볼 수 있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면 어렵기 한이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바둑을 두는 사람보다 훈수를 두는 사람이 더 잘 두는 것처럼 보인다. 훈수 두듯이 살면 좋겠지만 인생은 언제나 실전이다.
 가을이 깊어가니 철학자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과거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던 것들이 의미를 부여하려고 달려든다. 멋대로 길목을 돌아가던 가을이 묻는다. “너는 또 뭐길래?”
 “그려, 나는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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