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순옥 <시조시인>

 

‘그래, 사고 한번 치는 거야! 그런데 나 혼자 빠져나가면 빠진 자리가 너무 좁아서 안 될 것 같아 확실하게 표를 내야해 그러려면?’

나는 내 짝꿍과 내 뒷자리에 앉아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우리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 급식이란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꿈에도 생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학교 가까운 데 사는 애들은 거의 다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지 않고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나와 두 친구도 그런 아이들이었고 그들의 집보다는 우리 집이 훨씬 가까웠다. 집이 좀 먼 애들은 뛰어가서 점심을 급히 먹고 다시 뛰어와서 숨이 차게 수업에 들어가야 했지만 좀처럼 어머니들은 도시락을 싸주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난했던 우리들의 어머니들이 남들 앞에 펴놓고 먹는 도시락을 싸주시는 데는 여러 가지로 어려웠을 것이리라 이해는 되지만 눈, 비오는 날이면 집에 가기가 귀찮아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많기도 했다. 그런 시절에 내가 친구들에게 가까운 우리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자 좋아라고 나를 따라 나섰던 것이다.

갑자기 찾아든 우리들이었지만 새언니는 우리를 위해 정성껏 점심상을 차려주었고 우리는 배부르게 밥을 먹고 마룻바닥에 벌렁 누워 한껏 여유를 즐겼다. 그때 나는 친구들에게 내친김에 오후 수업을 빠지고 우리 원두막에서 놀자고 제안을 했다. 그런데 내 제안을 받은 친구들의 눈망울에는 겁이 잔뜩 고여 그렁거렸다. 그런 눈을 보자 나는 마음이 약해져서 친구들은 돌려보내고 나 혼자 수업에 빠지자고 마음 다지고는 나는 배가 아파 학교에 못가겠으니 너희들끼리 학교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친구들은 앞장서서 원두막으로 향했고 나는 뻘쭘하게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이유야 어땠거나 우리는 즐거웠고 참외랑 수박이랑 잘 익고 예쁜 것으로만 골라 따다가 실컷 먹으며 학교 생각은 까맣게 잊고 놀다보니 긴긴 여름해가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학교로 갔다.

책 보따리를 가지고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려했으나 이게 웬일인가, 학교의 출입문도 창문도 꼭꼭 잠겼으니 책 보따리를 꺼내 올 방법이 없었다. 학교 용원아저씨를 찾아보았으나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를 도울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는 풀이 죽은 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친구들이 나 때문에 집에 가서 혼날 것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하여 또다시 제안을 했다. 각자 집에 가서 저녁을 먹은 뒤 우리 집에 모여 공부하다가 내일 아침에 학교로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책 보따리는 이미 우리 집에 두고 왔노라고 하고 다시 모이는 것이 어떠냐했더니 친구들은 그럴싸하여 신 바람난 듯 받아들였다.

친구들은 약속대로 저녁을 먹고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는 내 방에 들어 앉아 공부한답시고 가족들은 내 방에 아무도 오지 말라고 으르고는 밤새 수다를 떨며 놀다가 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그때 부모님들은 우리들을 과신했거나 무관심했던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느 쪽인지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 그저 아련하고 달달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한 아름다운 반란으로 추억할 수밖에.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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