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국회의원>

 

겨울 중선암 계곡물은 차고 맑았습니다. 얼음장 밑으로 물은 얼지 않고 소리치며 흘러내렸습니다. 옛사람들은 계곡물 흐르는 큰 바위 근처를 별장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퇴계선생은 단양천 상류 복도소 근처에 와서 쉬면서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의 산과 물을 찾으면 도(道)가 회복된다고 하여 근처 바위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란 글자를 새겨놓았습니다. 별업이란 별장이란 뜻입니다. 상류의 물에 손발을 씻으면 마음까지 깨끗해진다며 탁오대(濯吾臺)라 이름하고 친필 글씨를 새겨놓기도 했습니다. 사인암에도 그곳이 자신의 별장이라 여긴 이가 있었고, 하선암을 자신의 별장이라 생각한 이가 있었던 듯 곳곳에 이름과 함께 별업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돈 들여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도 그곳이 자신의 휴식처라 생각했고, 바위 아래로 흘러가는 맑은 물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도시를 벗어난 곳에는 많은 전원주택들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번잡한 도시를 빠져나와 자연 속에 들어가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별장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탁 트인 산과 물을 바라보며 살아도 세상을 보는 시야는 좁아지고 있고, 물질적으로는 넉넉해졌는데 심신은 더욱 지쳐 있습니다. 물 좋고 산 좋고 바람 좋은 곳을 찾는 시간은 늘어나는데 성찰하는 시간은 줄었습니다. 옛날보다 이삼십년 이상 수명이 늘어났는데 그 시간을 정신적으로 얼마나 풍요롭게 채우고 있을까요?

문맹률은 낮아지고 많이 배운 사람은 늘어났지만 많이 배운 지식으로 세상은 더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일하면서도 삶을 전쟁터로 여기는 이가 많고, 국민 소득이 크게 향상 되었는데 자살률은 더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크고 작은 행성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술은 개발했으면서도 한 치 밑에 있는 제 마음은 들여다 볼 줄 모릅니다. 세상이 이렇게 편리해졌는데도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불편해지고 있습니다. 의학 수준이 높아지는 동안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병은 더 많아졌고, 교회와 성당을 찾는 이는 늘어나는데 우리의 영혼은 더 혼탁해지고 수시로 악마들이 출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 많이 발전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더 많이 사유하지 않은 때문은 아닐까요? 더 많이 벌기 위해 일하면서 영혼을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겨울이라 하선암의 물은 차고 맑았습니다. 우리는 골짜기를 흘러가는 물, 바람 한 줄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맑아질 수 있는 영혼들입니다. 계곡물에 손을 씻지 않아도 물소리만으로도 얼마든지 맑아지는 정신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겨울 중선암 하선암은 곳곳이 마음의 별장으로 삼고 싶은 곳입니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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