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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소통으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자
동아시아의 소통으로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자
  • 동양일보
  • 승인 2016.11.0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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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 공감하는 교류는 한·중·일 관계 개선 실마리

지난 10월 1~3일 청주시 우암동 충북예총 따비홀에서 열린 ‘동양포럼-한·중·일 회의 Ⅱ’에 참석했던 한·중·일 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 동양포럼에 대한 각자의 소감을 보내왔다. 10월 31일에 이어 두 번째로 젊은 지식인들이 보내온 감상문을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 동아시아 실심실학 공동체를 구상하게 됨

 

이번에 무엇보다 동양일보의 인문학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사명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동아시아가 공유하는 문화·사상·철학은 철학이 대화로 살아있는 청주, 그리고 거기에 있는 동양일보가 기점이 돼 열리는 것이 아닐까? 한·일의 문화우호, 여기에 중국이 포함된 동아시아의 환경연대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포럼에서 중국 요녕성 출신의 류 지엔 훼이(劉建輝) 국제일본문화센터 교수는 새로운 ‘동아시아문화공동체’의 공동구축을 강조했다.

한편 나는 ‘동물생명’과 ‘식물생명’이라는 말로 영양-생식의 ‘식물기관’과 그 주위를 둘러싼 감각-운동의 ‘동물기관’을 함께 지닌 인간신체가 후자의 압도적인 비대화·거대화에 지배되고 있는 불건전함을 말했다.

인간신체에 내재해 있는, 대우주와 공진(共振)하며 사는 ‘식물생명’이, 눈 앞의 먹이?욕망의 획득이라는 ‘동물생명’에 압도됨으로써 현대인과 현대세계는 ‘동물적 생명?·문명’으로의 편중에 의해 불건전한 신체와 사회를 갖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있는 ‘일본동아시아실학연구회’는 한국과 중국의 실학학회와 2년마다 돌아가면서 실학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 나라의 실학연구라는 좁은 틀에 머무르고 있다.

이번 동양포럼을 계기로 나는 류 교수를 비롯해 오구라 기조, 카타오카 류 두 선생께도 협력을 요청해, ‘동아시아 사상-실심실학을 주축으로 함-문화공동체’ 구상을 협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동양포럼 : 작지만 위대한 시도

 

10월 1일 국군의 날부터 10월 3일 개천절까지 예비역 장교이자 한국인으로서 의미 깊은 날, 한국·일본·중국의 학자와 학생들이 함께 하는 특별한 자리에 참가했다.

‘동아시아는 새로운 철학과 그것을 위한 새로운 어휘를 필요로 한다’는 김태창 교수님의 취지 설명으로 시작된 동양포럼은 단군 건국신화의 개천, 동학의 개벽 사상을 언급하며 막을 열었다.

생명·공공성 등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공통점을 인식하는 동시에 차이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 소통의 철학적 문제와 해결실마리, 숨(호흡)의 공공적 가치 인식 등 세대와 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한 논의가 오갔다.(사실 북한을 빼놓고 동아시아의 미래를 얘기할 순 없다. 정치, 군사, 경제 영역에선 몰라도 학문을 비롯한 민간영역에서 만큼은 함께할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바란다.) 사상, 명분 등에 매몰된 기득권구조와 소모적 분열에 갑갑함과 절망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젊은이로서, 생각의 나래를 마음껏 펼쳐보기도 하고 훌륭한 선생님들의 이야기도 들으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간의 독서와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쌓아온 생각들을 검증받고, 철저하게 비판받고 무너지자는 마음으로 포럼에 임했다. 일본, 중국의 또래친구들과도 국적에 관계없이 생각을 공유하며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한창 공부 중인 분야를 오구라 키조 교수님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과도 의논하며 생각을 넓힐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님과 김태창 교수님 그리고 불편함 없도록 힘써주신 유성종 선생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3일 간 함께 한 모든 분들께 마음 가득 감사드린다.

위대한 철학은 자신이 딛고 선 그 자리에서 우러나온다. 청주에서 열린 동양포럼은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갈, 작지만 위대한 시도다.

그 주체는 어느 누구도 아닌 여기 모였던 모든 ‘나’여야 한다. 나 역시 내 안에 응축된 생각들이 나의 언어로 터져 나오고, 다른 이들과도 공감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 머리를 높이 띄우되 두 발은 철저히 땅에 붙이고 ‘행동’할 것을 다짐하며, 소중한 가르침과 추억을 가슴에 품는다. 나를 ‘개벽’하고 나를 ‘개천’할 수 있도록, 나를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더욱 공부하자!

 

● 동양포럼 : 동양 삼국의 생명과 호흡의 장

커뮤니케이션 능력. 단순히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이 말 하고자 할 때 상대방의 표정과 상대방과의 공기, 주위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하는 능력, 또는 귀담아 들어 때로는 맞장구도 쳐 줄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기도 한다.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약한 나로서는 솔직히 대단히 어려운 고도의 능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라서 한참 생각 중일 때 화제가 겨우 떠올라서 말해보려고 할 때는 이미 긴 침묵의 상태가 이어져, 말 꺼내기도 곤란한 상태에 빠진다.

이미 상대방은 다른 화제에 대해 말하고 있고, 상대방의 일방적인 질문 중에 몇 번이고 묘한 침묵이 어색한 분위기를 지배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도 인터넷이나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특정의 공간에서는 이 말 저 말까지 다 토로해 버리는 수다쟁이가 되곤 한다.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 약점인 긴장감이 사라져 버린 영향이 크겠으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때는 인터넷 가상 공동체 공간에 빠져 여러가지 어려운 표현과 인터넷에서 얻은 지식을 뽐내면서 별별 아는 척을 다 해보기도 하면서, 채팅이나 투고를 해본 적이 있으나, 문득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나 혼자만의 방이라든지,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길거리 한복판, 지하철 안이곤 했다. 동양포럼에서는 여전히 사람 앞에서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얘기를 앞으로 할 것인지가 다 날아가 버려서 변함없는 나 자신이 그곳에 있었지만, 가상공간과 같은 쓸쓸함과 허전함은 없었다. 그곳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뜨거운 논쟁의 장이었다. 한·중·일 삼국의 미래를 위한 너무나도 스케일이 큰 토론의 장이었다.

물론 토론의 내용이 뜨겁다라거나 한·중·일이라는 삼국의 스케일도 그렇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뜨겁고 큰 스케일이라는 것은 타자의 생명과 호흡이 직접 피부로 와 닿는 말 그대로 뜨겁고 무수하고도 큰 생명의 장을 뜻한다.

그곳에서는 서로의 감정을 자극시키는 저속한 뉴스라든지, 고착화된 이데올로기나 합리주의적인 현대화된 현실적인 사상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런 것에 농락당하거나 휘둘리지 않는 강하고도 연대적인 주체만이 존재했다.

 

● 동아시아,호흡과 소통으로 새로운 미래를

 

동아시아 관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최근의 동아시아 정세가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중·일 3국은 영토문제나 역사 인식 문제로 오랜 기간 갈등을 겪어 왔고, 최근에는 사드 문제로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마찰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일까. 최근 우리 사회는 동아시아의 관계 개선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목소리는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나는‘동아시아의 활명연대(活命連帶)를 제안’한다는 흥미로운 주제에 이끌려 동양포럼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동아시아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포럼을 통해 소개된 다양한 시선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생명’이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동아시아의 미래를 생명이라는 주제로 열자’라고 하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포럼을 통해 이해한 생명은 우리가 단순히‘목숨’이라고 생각하는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나와 상대방의 관계를 바라보거나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희망’이었다.

예를 들어, 호흡이라는 행위는 우리가 매 순간 반복하고 있는 생명과 직결된 행위이다.

동시에 호흡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기도 하며, 누군가가 대신 해 줄 수 없는 본인만의 주체적 행위이다. 그리고 이렇게 호흡을 하는 주체적 개체들이 모이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통은 공공적 차원에서의 호흡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은 한 개인만이 호흡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호흡에 맞추어 본인의 호흡을 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본인의 주체성을 발휘하면서 타인의 주체성까지 잘 받아 들여야만이 진정한 소통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을 통해 우리는 혼자 호흡할 때에는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것이 가능해진다.

동아시아 관계도 이러한 호흡과 소통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동아시아 관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현재의 논의에서, 동아시아 3국은‘과거는 잊고 미래에 집중하자’라는 말과 같이 이상에만 집중하거나, 혹은 서로의 차이점에만 몰두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것과 같이 양극화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개개인의 독자적인 호흡을 통해 주체성을 발휘했다고는 볼 수 있을지 모르나, 결코 상대방의 호흡에 맞추어 소통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

오늘날 동아시아 3국은 이러한 호흡과 소통의 관계를 잘 이해하여 각국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상대의 그것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시선, 사고방식을 생각해 내야 한다. 과거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들은 발화언어는 달랐지만, 한자라는 공통 문자를 통해 정치, 경제, 문화 등 영역에 관계없이 활발히 소통을 해 왔다.

이는 서로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기반을 만들어 오랜 기간 평화를 유지하게 한 한편, 상대와의 소통을 통해 혼자서는 이루어낼 수 없는 정치적, 문화적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다.

각국의 단독적인 호흡을 넘어 상대와의 소통을 중요시할 때, 동아시아 3국은 현재의 갈등을 극복할 다양한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새로운 생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생명의 나약함을 실감하는 계기

 

먼저 한·중·일의 저명한 교수, 차세대 연구자와 함께한 ‘철학 대화’에 참가하게 되어서 대단히 기쁘고 감사하다. 많은 배움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생각했었던 한·중·일의 ‘활명연대’의 나아갈 길이 명확하게 제시되었던 부분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화를 거듭하면서 좀 더 현실적이면서도, 좀 더 이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내가 동양 포럼에 참가해 느낀 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번 ‘한·중·일 동아시아에 어떠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가?’라는 주제에서 나는 동아시아의 대립, 충돌, 갈등 등의 공통의식은 다름 아닌 같은 공동적인 토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시아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대립이 성립되는 것은 공동의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은 무엇이 공동인가에 대한 자각이 없어서가 아닐까? 근본적인 토대로써의 공동성을 무시하고 새로운 공동체 형성만을 쫓아서는 진정한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포럼의 커다란 주제이기도 한 ‘우주 생명’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생명이며, 이 생명의 자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해야 우주 생명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다. 다른 분의 지적도 있었지만, 일본은 특히 젊은 세대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몇 가지 대안과 의견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는 생명의 나약함을 뒤에서 계속 지켜보는 ‘후미의 리더십’이라는 내용에 공감을 얻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는 생명과학이나 생명윤리라는 학문에 생명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지만, 왠지 물질적이고 차가운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또한 근대화라는 물건의 대량생산의 영향으로 물건에 대한 생명이라는 개념이 없어져 버렸다. 이를 계기로 우리들은 생명이라는 것은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생기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라고도 자각을 할 필요가 있다.

이 나약한 생명을 계속 지켜본다는 것은 어지간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려울 수도 있다.

나에게 동일본대지진이나 세월호 대참사는 생명의 슬픔과 보잘것없는 나약함을 알려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동아시아의 공동체(共??)의 형성은 근본적인 공동성의 자각과 타자와의 지속적인 대화라는 조금씩이지만 견실한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 미래공창은 문제구조의 공유에서

 

역사학은 ‘미래의 공창(共創)’에 어떻게 하여 관여할 수 있는 것일까? 기본적으로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역사학자로서는 이 점에 대하여 생각하게 했다.

그런 한편 새롭게, 보다 나은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비참하다고 생각되는 ‘현재’가 왜, 어떻게 해서 성립했는지, 그 프로세스와 문제구조를 철저히 해명하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미래’를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아시아에 있어서 ‘미래의 공창’은 문제구조의 공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 차가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면 상대방은 언제까지나 신뢰할 수 없는 타자

 

10월 1일부터 3일간에 걸쳐, 한국, 중국, 일본의 학자와 학생들이 문화의 도시, 철학의 도시로 알려진 청주에 모여, 동아시아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서로간의 주장과 입장을 활발한 토론을 통해,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었던 뜻깊은 포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중일 삼국은 2000년 이상의 교류가 있었지만, 긴 역사 안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서로만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은 의식형태나 사회제도가 너무나도 달라, 한중일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전진할 수 있는 길을 걷고자 한다면, 동양포럼처럼 삼국의 국민이 함께 생각할 수 있는 열린 장이 더욱 중요시될 것입니다.

삼국이 서로 차가운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된다면, 상대방은 영원히 신뢰할 수 없는 타자인 상태로써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틀은 만들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나라라는 벽을 넘어서 동아시아의 관점을 가질 수 있다면, 삼국의 이질성보다는 오히려 동질성을 더욱더 많이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미야자키 교수의 “생명의 서열화”라는 문제제기에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이지만 주자학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주자학적인 사회라면 코마츠 히로시 교수의 저서 “생명과 제국일본”에서 쓰여진 “생명의 서열화”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리는 기에 부착하여 인간은 “본연의 성”과 “기질의 성”을 가지고 태어나, 내재된 기의 역량에 따라 발현된 리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 안의 서열이 정해집니다.

하지만, 코마츠 교수가 지적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주자학적인 사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한 다이나믹한 상하변동 메카니즘입니다. 하위부는 항상 노력하여 기를 맑게 하면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 상위부라고 해도 리의 투쟁에서 패하면 바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이 메카니즘이 없으면 사회가 교착상태에 빠져, 점점 생명력이 없어져 버립니다.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현실은 이 “생명의 서열화”가 교착상태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국가라고 알려져있는 중국이지만, 사실은 요시다 시게루 계보의 정치가가 정의한 대로 “공산주의는 민족주의의 일시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다”라는 말 그대로입니다. 주자학의 사고회로와 방식이 아직도 여전히 중국인의 정신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서열화 즉, 계층의 교착상태가 중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중일 삼국은 이와 같은 비슷한 상황의 사회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를 이후의 포럼에서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3면에 계속

 

● 개천(開天), 동아시아 새로운 세계를 열다!

-동양포럼에 참석하고-

 

10월 1~ 3일, 동아시아는 유의미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개천(開天)의 의미는 새로운 세계, 새로운 차원, 새로운 우주를 열어간다는 것이다.

근대기 독립 운동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육사는 그의 시 ‘광야’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후략)”

문명이 없이 흩어져 있던 대중들을 모으고 새롭게 디자인된 세계, 그것이 개천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시인은 닭 우는 소리, 즉, 鷄鳴(계명)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국, 일본, 한국의 동아시아 3국은 儒(유)·佛(불)·道(도)의 공통된 사상을 영위하면서도 각각의 고유한 빛깔로 그것을 재해석해 내었고, 그것을 토대로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고유의 사상, 문화를 만들어냈다.

나는 바로 그러한 시도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것이었다.

동아시아는 특히나 근대기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국주의시대의 물결 속에서 서로 상처주고 반목해 왔다. 그러나 이제 그 아픔을 딛고 새롭게 디자인 된 동아시아, 그 찬란한 노래를 부를 때가 무르익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는 조금은 대담하게, 설익은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 3국이 통합되기 위해서 주목해야 할 각자 고유의 영역, 즉 차이점에 주목하자는 것이었다. 공통된 요소에 주목해서 섣불리 통합을 얘기하기보다 서로가 부딪힐 수 있는 요소들, 민감한 요소들을 확인하고 좁혀나가는 일을 선행함으로써 진정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 자리에 모인 동아시아의 전문가 분들께서는 이런 나의 의견에 귀 기울여 주고 동조해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제 우리가 정말로 새로운 디자인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았다.

이육사 시인이 노래했듯, 우리 동아시아 역사는 눈 내리는 시간을 해쳐왔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누군가는 희망의 씨를 뿌렸고, 전쟁의 폐허에서 원대한 꿈을 꿔왔던 것이다. 이 포럼을 기획했던 유성종 위원장님, 김태창 박사님 등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다. 그 분들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왔던 것이다.

이제 그 희망의 씨앗이 파랗게 그 새싹을 틔운 것이다. 이제 이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서 그것을 노래할 백마 탄 초인이 올 날도 머지않았다.

후학으로서 그러한 새싹이 돋는 자리에 있었음을, 또 그 길을 같이 걸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에 너무도 감사하다.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앞으로 계속해서 동아시아 미래를 열어갈 벗들과 같이 걸어가기를 기원한다.

머지않은 날에 또다시 만날 것을 고대하며…….

 

● ‘함께 철학하는 도시’청주에서의 경험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첫 경험이었습니다. 학자, 미디어, 시민, 그 대부분이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는 나쁘다고 생각하고, 미래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정치, 경제, 군사 등의 관점에서는 물론 문화라는 관점에서도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닐까라고 최근 생각했다. 공통성이 있기 위해 태어나서 열화 문제도 있고,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도 각 국가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말할 수 없다.

각각의 국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우리는 미래에 폐쇄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철학의 수준에서 즉 예를 들어 생명에 대한 생각 차원에서 동아시아는 새로운 미래를 출현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생명을 민감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포럼에서도 지진의 이야기와 세월호의 이야기가 나왔다.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 근처에서 태어나서 약동하고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것이 시스템화된 사회가 현대사회이다. 도쿄사람들의 생명은 후쿠시마 사람들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본토 사람들의 생명은 오키나와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가? 정치가의 생명은 일반시민의 생명보다는 지켜져야 하는가? 군인의 생명은 국가를 위해 버려져도 좋은가? 현재 생명은 소홀히 되어 있다. 보고도 못 본 척한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는 어두운 생명서열화의 과거가 있기 때문 아닐까. 생명을 다루는 것을 극도로 피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생명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하게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가장 어린 참가자였다. 이런 좋은 자리에 초대받은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포럼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계속 철학하겠다.

 

●함께 철학하는 도시 청주

 

나는 동양포럼에 커다란 호기심을 가지고 청주에 갔다. 이번 포럼은 한·중·일의 저명한 학자분들과 젊은 연구자들이 3일간 ‘생명’이라는 주제로 적극적인 토론을 했다.

“토론의 양식은 주제보다 중요하다”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으로는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하려면 먼저 토론에 임하는 자세, 태도, 타자에 대한 배려야말로 새로운 가치관의 근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포럼은 관용성이 매우 컸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말하는 것이므로 한·중·일 뿐만 아니라, 북한사람도 함께 참가해도 되지 않느냐”라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의 발언이야말로 관용적 태도의 발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밝은 미래에 대한 강한 희망과 바람 그 자체를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왜냐하면 대화의 열린 장에서야말로 새로운 문명이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포럼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토론은 매우 인상에 남았다. 예를 들어 유교, 불교, 도교의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중·일의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한 입장, 수용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공통점도 있다. 동아시아는 근대 서양문명의 수용이라는 길을 함께 걸어왔다. 이 서양문명으로 인한 문제는 동아시아의 공통의 현대문제로 이어져 왔다.

높은 자살률, 낮은 출생률 문제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문제도 크지만, 이 사회 문제의 주된 원인은 바로 서양문명이 몰고 온 자기 이기주의(egoism)가 아닐까. 동양포럼에 참가한 학자들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생명론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인간은 모순 덩어리이다. 인간이란 제아무리 ‘생명 존중’을 외쳐도, ‘생명 혐오’라는 극단적인 니힐리스틱한 방향으로 빠져버리고 싶은 성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인생밖에 살 수 없다.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도 아까운 인생이 아닌가.

동양포럼에 참가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속에 청주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주라는 새로운 세계를 깨닫고, 새로운 동료들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동양포럼의 생명력이 넘치는 미래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방향성을 가진 대화를 지속해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또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무심천을 둘러보고 싶다. 그때도 이번처럼 무심천이 나라는 타자를 따뜻하게 반겨 줄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된다.

 

 

● 안에서 더불어 밖으로

 

청주에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돌아온 다음 날, 어머니께선 잘 다녀왔냐는 안부 인사와 함께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셨다.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이시다. 그날은 1학년 학생들의 현장체험이 있던 날 학생들을 데리고 대학로에 연극을 보러 다녀왔다고 하셨다. 연극을 보기 위해 긴 시간을 대기해야 했던 학생들 몇 명이 극장 앞에 놓여있던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의자가 휘어서 주저앉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곳에 놓여있던 의자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낡고 부실했고, 어린 학생 몇 명이 앉았을 뿐인데 의자의 구실을 하지 못한 채 망가져 버렸다. 다행히도 학생들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극장을 관리하던 경비원 아저씨가 나오더니 의자가 망가졌으니 원상복구하던가, 손해배상을 하라고 하는 통에 한바탕 실랑이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렇게 얼마 동안 피차 열을 올리다가 결국 경찰이 오고 나서야 수습되었다고 한다.

의자란 사람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불량배들이나 하는 것처럼 의자에 과한 폭력을 가하지 않고 단지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망가진다면 버려진 의자가 아니고서야 가져다 놓은 쪽이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학생들이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은 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의 손익만을 따지는 모습이 지난 3일, 나누었던 대화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며 마음속을 심란하게 하였다.

그 경비원도 아마도 다른 이들처럼 ‘세월호 사고’때에는 희생당한 어린 학생들을 걱정하며,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회가 좋게 바뀌길 바라며 목소리를 모으고 또 거기에 동조하여 사회에 큰 울림을 생산하지만, 정작 개개인 한 명 한 명은 분개하던 목소리와는 달리 일관되지 못 하고, 그토록 비난하던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변화되지 않은 채 그대로이지 않은가. 또는 자본이 파놓은 개인주의의 함정에 빠져서 내 테두리 밖의 일에만 팔짱 긴 채 시류에 기대며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데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청주에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돌아왔지만 표리부동한 개인들의 나약함과 한없는 가벼움에 슬퍼해야 하는지, 그런 개인들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 분개해야 할지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새로운 철학이 태동하는 도시, 청주에서 열린 ‘동양포럼’은 동아시아 세 나라의 뜻있는 지식인과 젊은이들이 모여 진지한 철학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첫 케이스가 아닌가 싶고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철학이 대화로 살아있는 도시 청주

 

지난해 11월, 쓰러진 농부를 태운 구급차가 광화문광장에서 내 눈앞을 지나갔다. 백남기 농부. 동양포럼에 참석하는 동안 이 농부의 죽음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의 목숨이 위협당했다는 사실은 포럼에서 문제 제기된 세월호 사건이나 동일본대지진보다 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의 피를 먹고 커져가는 국가의 논리에 의해, 국민의 피를 생산하는 농부의 숨이 끊어졌다. 과연 이 농부의 죽음은 동아시아에 무엇을 남길까?

서양적 근대든 토착적 근대든, 내가 생각하는 공동태를 기능시키는 두 가지 요소는 ‘다양성’과 ‘소통의 노력’이다.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에도, 일본에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닐지 모르지만 주장의 다양성이 존재한다. 백씨의 죽음을 둘러싼 의견의 다양성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본 민중총궐기나 여러 시민집회에는 진솔한 대화를 통한 소통의 노력이 없었다. 타자의 의견에 반박하거나 다수결로 이기거나 함으로써 자신의 진영이 승리하는 것에 목적을 둔 투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EU 탈퇴로 흔들린 영국,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후쿠시마를 겪으면서도 원전을 버리지 못한 일본, 세계 각지를 이런 대립적인 투쟁이 지배하고 있다.

고 백남기 농부란 과연 누구인가? 소통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정부의 수입규제 완화에 반대한 운동가 농부가 아니라, 이 나라의 목숨을 지탱하는 생산자 농부로서. “목숨을 생산하는 농부를 죽인 국가에 어디까지 분노할 수 있을까?” 이번 포럼을 통해 백씨의 죽음에 대해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이다. 생명 문화도시 청주에서는 이 죽음을 진영 투쟁의 논리로 보면 안 될 것이다. 목숨이 태어나는 시점인 생산자의 논리. 이로써 백씨를 죽인 근대에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봤을 때, 백씨의 죽음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다른 나라의 국내 투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명연대의 논리로 제기된 의문은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에 철학대화를 통한 소통의 범위를 넓힐 것이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철학이 대화로 살아있는 도시, 청주에서의 철학대화는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 ‘지금, 여기’의 생명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동아시아’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상투적인 표현으로 들릴 때가 있다.

실제로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만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서 말로는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미래가 없는 과거’, ‘미래가 없는 미래’를 그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이번 포럼에서는 ‘지금, 여기(현재)’ 에서 두 손 잡은 한·중·일 3국의 과거와 미래를 몸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미래가 없는 과거’란, 세 나라가 안고 있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중대한 과제들을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피해자와 가해자의 도식 속에서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반면, 류 지엔 훼이 선생님은 한·중·일 삼국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서양, 근대를 수용했으며, 이를 피상적으로 소화한 점까지 닮아 있다고 지적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중·일의 관계를 문제 해결 파트너로서 재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과 ‘미래가 있는 과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미래가 없는 미래’란 ‘미래지향’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이번 포럼에서는 미래의 문을 제 손으로 힘껏 열어 젖히는 동아시아인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다. 개천, 개벽, 다시 개벽. 유교에서 말하는 ‘인(仁)’이란 너와 나 사이에서 반짝이는 생명이라는 통찰. 내 안에서 시작된 호흡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깨우침. 그 속에서 떠오른 생명이 ‘미래가 있는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포럼 기간 동안 동일본대지진과 세월호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함께 철학한다’는 것은 책 속에만 있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 속 생명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과거와 미래 뿐만 아니라 현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청주에서 체험한 동아시아의 ‘활명연대’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생명을 위해 과거와 미래가 만나고, 동아시아 3국이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동아시아는 같은 아픔을 가진 이웃

 

지금까지 한·중·일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3국 간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면서 그 의견에는 동감하지만, ‘단순히 교류가 중요하다고 외치기만 해도 뭔가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번 동양 포럼을 통해 내가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 그것은 그냥 ‘교류’ 아니라 ‘아픔을 공감하는 교류’가 동아시아의 미래를 열기 위한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그 동안 동아시아 3국은 빨리 선진국이 되려고 앞(=서양)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 학생들도 어른들도 더 좋은 지식이나 기술을 얻으려고 매일 밤늦게까지 바쁘기만 하고, 바로 옆에서 같이 사는 가족이나 친구들, 더 나아가 이웃 나라와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는 기회가 너무나 적었던 것 같다. 최근에는 남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냉소하거나 공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보이고, 한·중·일 사이에서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일본도 자살률이 높은데 그래도 한국이 더 높아서 그나마 일본이 낫네.’ 이런 식의 서열 의식으로 상대를 보는 것은 잠깐의 위로가 될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사실 동아시아 3국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령화, 입시전쟁, 높은 자살률 같은 비슷한 사회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제는 ‘한국도 중국도 일본도 똑같이 자살률이 높은데,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까?’이런 식으로 동아시아 3국이 같은 아픔을 가진 이웃이라는 연대의식을 가지고 사귀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의식을 가지고 동아시아의 한 시민으로 살아가려고 다짐했다.

 

● 두 매개의 필요성

 

개천절에 맞추어 개최된 동양포럼의 한·중·일 대화는 국경을 넘고 세대를 넘는 주제를 가지고 3일 간에 걸쳐 열띠게 진행됐다.

3일간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된 논의는 참으로 내용이 짙고 알찬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3일 간도 모자란다고 할 만큼 진지한 논의가 교환되어서 이 포럼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다.

논의된 것은 여러 가지지만, 이 포럼의 과제에 대해 ‘두 매개’라는 논점을 제기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상(思想)’과 ‘현실(現實)’의 매개이다. 이것은 혹은 ‘미래’와 ‘과거’의 매개라고 표현하여도 좋을는지 모르겠다.

이 포럼이 사상사(思想史)의 연구회가 아닌 이상, 단순히 과거의 사상에 관하여 연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사상자원(思想資源)에서 배우고 우리들이 어떠한 미래를 열 것인가를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할 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있는 ‘현재’의 우리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여간해서 미래에 진입할 수 없다는 당연한 우려도 있다. 사상이 직접 문제해결에 기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어떤 시사(示唆)를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고, 그것을 살리는 것을 우리들은 유념해야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대간(世代間)의 매개이다. 이번 포럼에서 특기할 일은 젊은이들을 위한 세션이 셋이나 되고, 젊은이가 발제하는 세대간의 대화를 기획하였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그 하나의 세션을 발제하였지만, 논의가 활발히 진행된 것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 그와 함께 세대간 인식의 차이가 밝혀지지 않았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도 확연하다.

예컨대, 근대(近代)나 서구화(西歐化)라는 면에서도, 나를 포함하여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오히려 서구화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서,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동양적 가치를 경시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어느 쪽이든지 좋은 것은 살려서 수용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서로의 상이(相異)를 인식하고 공유(共有)하고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을 이번 포럼에서 모두 다 공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경도 세대도 다른 참가자들의 대화는 이제 시작된 것뿐이라고 여겨지지만, 퍽 의미 깊고 커다란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자리에 참여할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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