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영수(취재부 부국장)

▲ 지영수(취재부 부국장)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참으로 덧없다. 최근 뜻하지 않았던 ‘최순실 비선실세 의혹’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이원종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인생사를 보면 그렇다.
충북 제천 출신으로 체신부 9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해 광화문 우체국 공중전화 동전 수거원으로 일하며 주경야독으로 야간대학에서 공부하고 마침내 행정고시까지 합격한 입지전적인 인물.
소나무 껍질로 허기를 때울 정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 꿈은 ‘봉양우체국장’이 되는 거였다. ‘알쫑이(알토란 같은 원종이)’라는 별명도 이때 얻었다.
그의 인생여정은 순탄치 많은 안았다. 서울시 5개 구청장을 거쳐 대통령 비서실 내무행정비서관, 충북도 관선지사(1991년)와 두 번 의 민선지사, 서울시장, 서원대총장을 지내는 등 경력이 화려하다.
관선시대인 1993년 1월 7일 청주 우암상가가 무너져 충북지사에서 물러난 뒤 김영삼 대통령에게 발탁돼 지방행정의 최고봉인 서울특별시장에 취임했으나 1994년 10월 21일 또다시 성수대교가 무너져 경질됐다.
이로 인해 그가 가는 곳은 대형사고가 잇따른다는 근거 없는 괴담까지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서원대(1996년) 총장과 민선 충북지사를 두 번 역임하며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충북도민들에게 깊이 각인됐다.
특히 충북지사 3선이 유력시되던 2006년 ‘아름다운 용퇴’라는 말을 남기며 선거 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 정치권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당시 ‘공을 이뤘으면 몸은 떠나는 것이 하늘의 도(功遂身退 天之道·공수신퇴 천지도)’라는 노자의 말을 인용, “꿈꾸고 계획했던 일들을 거의 다 이뤘고 충북지역의 현안들도 모두 해결됐다. 떠날 때 떠날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며 용퇴했다.
그의 결단에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최고의 자리에서 박수칠 때 떠날 줄 아는 ‘이원종’에 대한 무한한 종견과 응원을 보냈다.
충북지사 시절 비서실 직원도 모르게 맏딸 결혼식을 치르는 등 소탈한 성격에다 특유의 친화력과 뛰어난 재담으로 인기가 높았다.
그는 ‘행정의 달인’으로 정평이 난 터라 정부 개각 때마다 국무총리나 대통령 비서실장 후보 1순위로 꾸준히 거론돼 왔다.
대통령직속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던 지난 5월 의외로 대통령 비서실장에 발탁됐을 때 기대와 함께 우려가 교차했다. 70대 중반에 자리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왜’라는 물음과 ‘제대로 할까’라는 걱정이 교차한 것이 사실이다.
그의 온화한 인상에 서글서글한 눈매, 성품을 잘 아는 충북관가에서는 청와대의 ‘불통과 전횡’의 이미지 때문에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청와대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과 진흙탕에 발을 들였다는 촌평이 엇갈렸다.
결국 행정의 달인, 이원종은 5개월 만에 무대 밖으로 물러나면서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는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진 뒤 ‘봉건시대’ 발언으로 여론의 웃음거리가 됐다.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문건유출에 대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 발언은 ‘국정 개입’ 문건유출 정황이 담긴 태블릿PC가 나오면서 조롱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 전 실장은 지난 달 28일 춘추관을 찾아 “저 자신도 반듯하게 일 해보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으니 마음이 아프다”는 퇴임 인사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불명에 퇴진하자 지역에서는 ‘금의환향이 아니라 걸레가 돼 돌아왔다’. ‘그 나이에 왜 복마전에 들어갔냐’는 등 반응이 싸늘했다.
다른 일각에서는 ‘그도 속았다. 피해자다’, ‘지역의 원로가 너무 큰 상처를 입고 돌아와 안타깝다’는 동정론도 일었다.
정치꾼들이 판치는 정글 같은 곳에서 외로운 섬 같은 존재였던 ‘행정의 달인’ 이원종은 이제 무대 저편으로 사려졌다. 그야 말로 최순실 게이트의 피해자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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