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인문학 특강 4

▲ 동양포럼 주간인 김태창 박사는 지난 1일 충북도청 대회의실에서‘이 시대가 요구하는 충청북도 공직자의 자세’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사진·최지현>

(동양일보 조아라 기자)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 1일 충북도청에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충청북도 공직자의 자세’를 주제로 강연했다. 이날 강연에서 김 주간은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논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지방공무원들과 충북도민들이 공공성의 정립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설파했다. 김태창 박사의 특강 내용을 수정, 보완해 싣는다. <편집자>


안녕하십니까?방금소개받은 김태창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 자신이 생각해온 공공하는 철학의 일단을 말씀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밝혀둘 것은 공공하는 철학이 때와 곳과 자리-시처위(時處位)-의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모든 문제를 당면한 시대의 요구와 처한 상황의 필요와 놓여진 위치의 조건에서 근본적으로 재점검함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그 실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인간적, 공동태(共動態)적 영위입니다. 
저는 ‘공동체(共同體)’라는 말이 너무 동질성을 강조하는 폐단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아서 다양한 이질적인 주체들이 서로 아우러지는 역동적인 동태상을 의미하는 ‘공동태’라는 말을 선호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당면한 시대의 요구부터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저 자신이 개인적으로 파악한 이 시대의 요구는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난 시점에서 공공화(公共化)의 올바른 인식과 균형 잡힌 실천에 초점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화가 공공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권력의 붕괴로 말미암은 무정부-무규범, 무질서, 무권위-상태를 초래하게 되어 민주화 자체가 무의미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민주화란 권력의 형태가 군사독재체제로부터 민간대표체제로 바뀌는 과정을 의미하지만 권력 행사의 정당성은 권력의 공공성이 인식·승인·납득이 될 때 비로소 확립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공권력(公權力)의 정당성의 근거로서의 공공성이 제대로, 똑바로, 널리 인식, 승인, 납득되고 있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요구는 공공성의 확립이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처한 현실 상황은 극심한 공공성의 인식과 실천의 결여로 인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비리·부정·부패의 만연입니다. 공과 사의 무분별한 혼동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생리화·체질화·일상화되어 있어서 커다란 희생을 치르면서 이루어낸 민주화가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한때 화려하게 피었던 꽃이 어이 없이 시들고 말지 않겠느냐는 염려와 불안과 회의가 구석구석에까지 스며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비리·부정·부패의 만연을 방지하고 척결하는데 필요한 공권력이 제대로 제 몫을 하지 못해서 올바른 민주주의 정치적·경제적·사회문화적 발전을 저지하고 있는데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관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의 우리 사회에 신뢰할만한 권위라는 게 있습니까? 오늘의 우리 사회에 믿고 따를만한 규범이라는 게 있기나 합니까? 오늘의 우리 사회에 모두가 지켜야 한다고 납득할만한 질서라는 게 있기나 합니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승용차를 타고 차창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면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직접 걸어 다니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주의 깊게 눈 여겨 보면 오늘의 우리가 처한 상황은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집 네 살 배기 손자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더럽다’, ‘지저분하다’, ‘냄새난다’가 거리의 실상입니다. 제가 하루에 세 번씩 날마다 집 근처의 쓰레기를 악착같이 줍는데 사람들은 악착같이 담배꽁초를 버리고 먹다 남은 음식과 그것을 싸고 있던 비닐을 아무데나 던지고 온갖 잡탕 쓰레기를 마구 쏟아놓기 때문에 사방이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상황이 조금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 청결 무감각증에라도 걸렸나 싶어서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자기 집안의 청결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데 일단 집 밖에 나와서 거리에 서게 되면 거의 청결 결핍증적 행동양식을 나타낸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것의 청결에는 신경을 쓰지만 남의 것의 청결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리가 남의 것입니까? 거리는 남의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것이기도 하고, 그와 그녀의 것이기도 해서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아무리 내 것의 청결을 철저하게 지키려 해도 주변의 남의 것이나 우리 모두의 것이 불결하면 결국 청결이 온전히 지켜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사람이 왕래하고 물건이 유통되다보면 밖의 불결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안과 밖이 동시에 청결해야 모두가 청결의 혜택을 함께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의 집안만의 청결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사(私)’적 청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남의 것의 청결도 중요하게 여기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청결을 함께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가짐과 행위 실천을 ‘공공(公共)’하는 청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청북도라는 도명에 있는 충청(忠淸)이란 한자에는 맑고 깨끗함을 중심축으로 삼는 마음자세와 행동양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또 청주(淸州)라는 한자에는 맑고 깨끗한 고을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가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난다면 도가 이름값을 못하고 시가 이름에 걸맞지 않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충탁북도(忠濁北道)가 되고 오주(汚州)가 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로 우리가 놓여진 위치의 조건을 잘 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충청북도라는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이시고 저는 충청북도라는 지방자치단체를 떠받치고 있는 도민의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 자신이 함께 지니고 있는 공통점은 대한민국 국적으로 권리와 의무가 부여된 대한민국 국민인 동시에 중앙이 아닌 지방의 자립과 자치를 감당할 주체로서의 충청북도 도민이요, 저의 경우에는 청주시민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놓여진 자리입니다. 우리가 놓여진 자리는 세 겹으로 겹쳐진 자리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자리와 충청북도 도민이라는 자리와 청주시 시민이라는 자리가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여진 위치-위상-자리의 조건은 세 겹으로 겹쳐진 자리의 각각의 조건을 함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서로 아우르고 그 동력을 살려 가는데서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 우리가 놓인 자리에 주어져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거기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공공하는 마음 자세와 행동양식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스럽게 심사숙고해 볼 것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공공성 보다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공공성이 참다운 공공성의 실상이라는 점입니다. 국가나 정부나 대통령이 규정해서 국민에게 지시·전달·지도하는 이념이나 가치나 규범으로서의 공공성은 과거의 오랫 동안 ‘공(公)’이라고 불려온 것이며 기본적으로 ‘사(私)’=개인 보다는 ‘공(公)’=전체에 무게중심을 두는 신념체계입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멸사봉공(滅私奉公=필요하다면 사를 희생시켜서라도 공을 받든다)’의 사고방식이요, 행동 양식입니다. 그것과 대비·대결·대응되는 것이 필요하다면 ‘공’을 희생시켜서라도 우선적으로 사=개인의 이해와 관심과 목표를 내세우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입장과 과정과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멸공봉사(滅公奉私)’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멸사봉공은 위국진충(爲國盡忠), 국가지상, 민족지상, 애국애족 등등의 구호로 미화 선양되기도 했습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형태로 멸공봉사는 개인주의, 이기주의, 가족주의 등등의 명칭으로 격하매도 되었습니다. 최근에 일부 정당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선당후사(先黨後私=당 전체를 앞세우고 개개인의 사적인 이해관계는 뒤고 물린다)라는 말은 중국 고전에서 볼 수 있는 선공후사(先公後私=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물린다)라는 말을 말바꿈한 사례입니다. 이렇게 공과 사라는 두 개의 잣대로 모든 문제를 보고 판단하고 결론을 내는 것을 공사이분법(公私二分法)적 사고와 행동이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흑백논리요, 양단시비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로 다양화·다변화·다중화 되면서 단순계로서의 사회가 복잡계로서의 사회로 바뀌면서 공과 사라는 이분법만 가지고는 현실 문제에 적합·적실·적정하게 대응·대처·대결할 수 없는 여지가 너무나 많이 그리고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공사양분의 유효기간이 이미 지난 지 오래 되었다는 인식이 널리 그리고 깊게 퍼지고 뿌리내리기 시작한 지 한참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공’과 ‘사’의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거나 지나치게 특권화 시키지 않으면서 ‘공’과 ‘사’를 함께·더불어·서로 잇고 맺고 살린다는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을 ‘공공(하다)’로 자리매김하고 그와 같은 방향으로 시동·작동·진동하는 이념과 가치와 규범을 ‘공공성(公共性)’이라는 말로 정리·정립·공유하자는 것이 제가 그동안 일본을 거점으로 삼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각각 지역의 학자, 학생, 시민들과 대화·공동·개신의 과정을 통해서 일으켜온 공공하는 철학대화 운동입니다. 거기서 나온 공통인식의 뼈대를 간추린 것이 동경대학 출판회에서 나온 시리즈 ‘공공철학’ 전 20권이고 그것을 보충하는 문헌 10권을 합쳐서 전 30권에 정리·기록·공개되어 있습니다. 
그 철학대화 운동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로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학습·연구·경험해온 그쪽의 공공논의를 수입·번역·해설·적용하는 데 중점이 놓여진 공동조사·공동발표·공동조정이 진행되는 가운데서 영어나 독일어나 프랑스어나 다른 나라 언어에서는 ‘공공성’에 해당하는 개념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태여 말하자면 공간·영역·장소나 또는 이성·규범·재화·담론의 공공적인 성격을 규정하는 형용사로서 빈번하게 사용되고 중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중요한 시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한·중·일을 왕래하면서 이루어진 비교 연구를 통해서 공공성이라는 가치규범을 누군가가 또는 어디선가 미리 정해놓고 그것을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동일화의 방향으로 계몽, 계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다중·다층의 계기와 기회와 공간·영역·장소에서 펼쳐지는 이성적·규범 형성적·재화공유적 담론을 통해서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이 널리 인식되고 그 인식에 의거한 활동·실천·행위가 축적·심화·확충된 결과라는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일부 주류 철학자들이 ‘공공성의 철학’이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과 분명한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서 저 자신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저와 인식과 실천을 함께 해 온 일본과 중국의 학자·학생·시민들은 ‘공공하는 철학’이라는 명칭을 고집해 왔습니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를 인식한다고 해서 공공하는 마음자세나 행동양식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이 비록 사적인 동기에서 출발한다 해도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점진적으로 내 것만이 아닌 남의 것도 배려하면서 우리 모두의 것을 함께 귀히 여기고 더불어 살려서 서로가 고루고루 행복하게 되는 사회-공복사회(共福社會)-를 함께 이루는 것이 공공하는 철학의 지향이요, 목표요, 과제이기 때문에 전문가의, 전문가에 의한, 전문가를 위한 공공성의 인식론적 탐구와는 크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중앙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 삶의 터전인 지방의 자립과 질적인 향상을 우리 스스로의 의욕과 능력과 자원을 결집해서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공공화’는 지방으로부터 태동해서 중앙마저도 변혁시키는 근원적 개혁력입니다. 과거의 오랫동안 ‘공’이 관 주도로 이루어져 온 것과는 달리 새로운 ‘공공’은 민관공동(民官共動)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생태학의 기본원리에 의하면 생태계의 붕괴는 중심부가 주위 환경에 적합·적정·적절하게 대응·대처·대결하지 못할 때 서서히 또는 급격하게 발생하는데 그것을 방지하거나 혹은 재생시키는 것은 주변·지방·외곽 지대에 저축된 생태 회복력이 발휘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나라의 중앙핵심부로부터 나타나는 총체적 구조적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중앙에서 벌어지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의 작태에서는 적합·적정·적절한 대응·대처·대결 능력이 보이지 않고 따라서 나라와 겨레의 보다 나은 미래를 함께 연다는 ‘미래공창(未來共創)’의 원동력·결집력·추진력이 고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요구와 처한 현실의 필요와 놓여진 자리의 조건에 능동적, 적극적, 자주적으로 대응·대처·대결하면서 나라와 겨레의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미래공창’의-새로운 원동력과 결집력과 추진력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서울이 아닌 충청북도에서 태동·시동·작동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란한 구호나 그럴듯한 선전이나 광고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철학이 있어야 하고 새로운 철학에는 새로운 어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공공화(公共化)’요, ‘공공’하는 마음 자세와 행동양식이요, ‘공공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종교입니다. 
그래서 충청북도라는 삶의 터전에 응축된 근원적 생명력, 주변에 저장된 생태적 복원력, 지방으로부터 시발하는 변혁력을 균형 있게 아우름으로써 위기 극복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충청북도 공직자의 올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그것은 반드시 충청북도 도민과의 철저하고 지속적인 ‘민관공동(民官共動)’으로만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방자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지름길이 된다고 여겨지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조아라·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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