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식 <충북문화재단 대표이사>

나에게 누군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어린 시절의 무심천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청주에서 태어나 살던 곳이 석교동이고 무심천을 지척에 둔 복으로 놀이거리가 마땅치 않던 그 시절,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은 신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틈만 나면 형들과 동네친구들과 어울려 물놀이를 하며 송사리를 잡던 시간, 다시 놓아줄 피라미들을 통속에 잡아넣기까지 앞 다퉈 경쟁을 벌이고 웃고 떠들던 시간, 물가에 비친 저녁노을의 붉은 기운을 뒤로 하고 젖은 옷으로 한줄 지어 집으로 돌아오던 그 때의 모습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어 기억의 창고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찾아 일부러 떠나지 않아도 자동차를 운전하며 남석교, 꽃다리를 지나게 될 때면 다리 밑 무심천 물가에서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놀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게 된다.

그 순간, 과거의 시간과 현재, 미래가 찰나 속에 하나라는 생각이 들며 삶과 죽음도 나눠진 것이 아니라는 것에 마음이 귀결된다. 바라볼 줄 안다면, 의미를 부여할 소소한 마음만 있다면, 기억의 창고를 행복으로 채우는 일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행복은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의 기억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이다.

늦가을로 여겨지는 어느 날 어머니는 평소에는 잘 입지 않으시던 하얀 저고리에 검은 치마 한복을 차려입고 나의 손을 이끌어 어디론가 데리고 가셨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있었고 어머니와 나도 그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6살 정도의 어린 나는 눈물을 닦고 있는 어머니에게 왜 우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그 때 어머니의 말씀은 ‘청주에 훌륭한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하셨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그것이 바로 충청북도 최초로 치러진 청암 김원근 청주대 설립자의 ‘사회장’이었다.

한 사람의 귀천(歸天) 길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그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던 것이 충격이었고 귓속에 새겨진 ‘어르신’이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나이를 들어가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의미가 되었다.

6.25 전쟁 후 나라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재를 기르기 위해 가진 전 재산을 들여 동생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교육구국’이라는 일념으로 일궈낸 오늘의 사학이 내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보게 된 그 어르신의 발자취였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불려 지는데 근간을 제공하셨던 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라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재난민과 빈민들을 구제 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여 보은을 입은 사람들이 세웠다는 치적비는 어머니가 들려준 ‘훌륭한 어르신’이라는 말에 그 의미를 다 담고 있었다.

어른은 많으나 어르신이 없는 사회는 정신적 빈곤만이 악순환 된다. 굳이 명작집에서 읽은 위인전이 아니어도 어머니의 음성 속으로 들려진 존경의 언어 ‘어르신’은 내 안에 충분히 정신적 멘토요 위인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졸업한 학교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는 자리에 서 있다.

청주대 교문을 들어서며 양 옆으로 펼쳐지는 플라타너스 나무의 언덕길 한 가운데 청암로를 지날 때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차 속의 나는 자동차 앞 유리창 너머 슬픔에 젖은 많은 사람들의 도열과 그 속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긴장하며 서 있는 어린 나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 아이를 향해 그 아이는 나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찰나인 것이 다시 느껴지는 시간, 우리 모두는 그렇게 잊지 못할 기억과 잊혀 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며 귀천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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