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100만 촛불’이 타올랐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 빛은 암울하기만 했던 대한민국 역사의 물길을 새롭게 바꾸고자 하는 국민들의 희원이기도 했다. 촛불집회 직전 박근혜 대통령이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힌 2차 사과문 발표에도 성난 민심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지지율 5%에, 헌정질서를 파괴한 박 대통령에 대해 100만 촛불은 명령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청와대는 들끓는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런 청와대가 속내를 드러냈다.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하겠다던 박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유영하 변호사를 변호인으로 선임하고 그의 뒤에 숨었다. 지난 15일 유 변호사는 기자회견을 자처해 “사건 변론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검찰의 대면조사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0만 촛불의 강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처사로, 민심을 아직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반증이었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약속만 믿고 15일께 조사를 계획했던 검찰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이 ‘버티기’에 들어가면 검찰로서는 조사를 강제할 방법이 없다. 유 변호사는 17일 “내주 대통령 조사에 협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버스 지나간 뒤다. 최순실과 안종법, 정호성의 기소가 20일 쯤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검찰은 단정적으로 밝혔다. “최순실 의혹의 중심에 박 대통령이 있다”고. 박 대통령과 3인을 묶어 ‘공범’으로 적시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청와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반등의 기회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여러차례 피를 흘리며 민주화를 이루고 지켜왔던 우리 국민들의 의식 수준을 얕봐도 한참 얕본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약속을 뒤집은 대통령에겐 더욱 불리한 상황만 재연될 것이다.
사과문을 발표하며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것을 손바닥 뒤집듯 파기해 버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대통령의 격에 어울리는 행위인지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 든다.
17일 리얼미터의 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퇴진·탄핵 여론은 3주전 42.3%에서 73.9%로 급증했다. 대면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여론은 78.2%에 달했다.
이후로도 의혹의 정점에 대통령이 있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여러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하다하다 이제 ‘길라임’까지 등장했다. ‘시크릿 가든’의 여주인공 길라임을 가명으로 차움병원에서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는데 잔뜩 자세 낮췄던 새누리당 친박들은 적반하장 ‘역공’에 나서고 있다. ‘헌법의 수호’을 앞세워 야3당은 물론 김무성을 비롯한 비박계까지 싸잡아 맹비난하고 있다. ‘뭐 묻은 개 재 묻은 개 나무라는’ 모양,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판국이다.
국민을 우습게 봐선 안된다. 국민은 냉철하게 분노한다. 시간 지나면 잠잠해질 일이 아니다.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대통령의 최소한의 품격을 지켜야 한다.
마지막 남은 한 줌의 품격은 실체적 진실을 가감없이 밝히는 일이며, 국민들께 진정어린 사과를 하는 것이며, 도도히 흐르는 국민의 분노를 정확히 읽고 퇴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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