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속의 한국사<3>

●후쿠오카 현
-이즈카(飯塚)의 무궁화당(無窮花堂)
 
2차 세계대전 시기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이케(三池) 탄광, 치쿠호(筑豊) 탄광 등으로 강제 연행돼 열악한 조건 속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후루나가(古長) 광업소 한국인 숙소 벽에서 발견된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고 새겨져 있는 한글 문자는 당시 고통스러웠던 상황의 일단을 보여준다.
치쿠호의 탄광에서도 열악한 노동조건, 불의의 사고 등으로 다수가 사망했는데 묘가 있어서 해방 후 한국에서 연고자가 유골을 수습해 간 경우도 있지만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된 유골도 적지 않았다. 이를 무연불(無緣佛)이라 부른다.
‘재일 치쿠호 코리아 강제연행 희생자 납골식 추도비 건립실행위원회’는 강제 연행돼  무연불이 된 희생자 400여명의 유골을 수용할 수 있는 추도비를 세웠다. 이즈카(飯塚)시 쇼시(庄司)의 이즈카레이엔(飯塚靈園)에 정비된 ‘국제교류광장’에서 2000년 8월 10일 기공하여 12월 2일 낙경식(落慶式)을 가졌는데, 이 추도당을 ‘무궁화당’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재 39기의 유골이 봉납되어 있다.


[주소] 후쿠오카현(福岡縣) 이즈카시(飯塚市) 쇼시(庄司)의 이즈카레이엔(飯塚靈園)

-게쇼인(慶尙院)의 한국인 위령비
조센지 게쇼인에는 일제시대 징용되어 후쿠오카현 인근지역에서 노동하다 사망한 한국인 광부를 추도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物放朝鮮國人 精靈菩提’라고 새겨져 있는 위령비 속에는 광부들의 유골이 봉납되어 있다.
게쇼인을 세운 사람은 최용락(崔龍洛) 주지로 ‘게쇼(慶尙)’라는 이름도 그의 고향인 경상남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군속 노릇을 하다가 광복 후 부산으로 귀국했으나 한국어를 몰라 일본인 귀환자로 오인되어 하카다(博多)항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민속적인 찻집을 열기위해 우에노야키(上野燒), 다카도리야키(高趣燒) 등지의 도자기 굽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그곳에서 생산되는 도기가 한국인 도공이 남긴 유산이라고 인식하게 된 그는 한국인 도공의 유골을 찾기 위해 인근 사찰을 찾아 다녔다. 그는 인근 절에서 한국인 광부의 순직자 이름이 적힌 과거장(過去帳·절서 사망한 신도의 이름, 법명, 사망일자 등 신상에 관한 것들을 기록해 놓은 장부)을 발견한 뒤, 도공과 한국인 광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자신의 찻집 수입으로 게쇼인을 세웠다.
게쇼인 2층 본당에는 전쟁 전에 학살된 한국인 광부에 관한 사연을 담고 있는 한 쌍의 흰 고양이 도기가 놓여 있다.
[주소] 후쿠오카현(福岡縣) 이즈카시(飯塚市) 椿 598-2(天道驛)

-마와타리(馬渡)의 한국인 탄광노동자 합숙소
후쿠오카현 오무타(大牟田) 시내의 미쓰이(三井)석탄광업 미이케(三池)광업소 사택은 2차 대전 중 강제 연행된 한국인 수용소였다. 목조 단층인 이 건물은 향토사 연구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1944년 ‘미와타리 한국인 합숙소’로 개설되어 5동에 약 140명이 합숙했다고 한다.
그 중에 3동이 남아있고, 일부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외벽과 지붕은 당시 그대로 이지만, 내부는 수리했다고 하는데 1989년에는 건물 내부에서 연행된 사람들이 사용했다고 생각되는 조국 광복과 망향의 생각을 적은 낙서도 발견되었다. 현재 이 벽은 시내의 중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1993년 미쓰이 석탄광업이 이 사택의 토지를 미난 기업에 매각하려 하자, 배동록(裵東錄·50)씨는 ‘미와타리 한국인 수용소 자리를 보존하는 모임’을 결성, 그해 3월부터 본격적인 보존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정확한 숫자는 아닌지만 1958년의 조사에 의하면 전쟁 말기까지 이곳의 강제연행자 수는 미쓰이 탄광이 26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오무타시 앤후쿠지(円福寺)에는 미쓰이탄광에서 사망한 34명의 한국인 광부들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인 임길수(林吉洙)씨의 일본인 처가 엔후쿠지에 단가(檀家: 절에 묘를 두고 부탁하여 장례·불공을 지내는 건물)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3년 5월 17일의 위령제를 끝으로 위패도 불살라 아리아케카이(有明海)에 뿌렸다. 그 이후부터는 민단, 조총령 단체가 함께 매년 4월 첫째 일요일이 되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주소] 후쿠오카현(福岡縣) 오무카시(大牟田市) 호쿠부(北部) 아마기야바공원(甘木山公園)
-한국인 광부 유골을 안치한 간논지(觀音寺) 납골당
후쿠오카현 이츠카(飯塚)시 간논지(觀音寺)에는 20여구의 한국인 광부 유골이 있다. 전 주지였던 고가 하쿠엔(古賀博演)씨는 이국땅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위해 납골당의 가장 좋은 장소에 안치해 두었다고 한다. 유골 상자에는 강제연행 되었을 때의 일련번호와 함께 ‘반도인’이나 ‘선인(鮮人)’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아무도 찾는 이가 없는 무연불(無緣佛)이 된 것이다. 고가(古賀)씨는 전쟁 때에 아소광업소(麻生鑛業所)의 아카사카(赤坂)탄광에 근로보국대로 들어가 한국인 광부와 함께 채탄 작업을 했다. 아카사카탄광에서는 중상 입은 광부를 광차(鑛車)에 실어 올리면 아직 살아 있는데도 묻어 버리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놓았다고 말한다. 지금도 그런 묘의 일부가 부근에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주소]820-0069 후쿠오카현(福岡?) 이즈카시(飯塚市) 미야마치(宮町) 2-83

■ 명성황후를 관음상으로 모신 절(節信院·☏281-4182)
명성황후 시해(1895년) 이후, 1916년 청동으로 만든 관음상을 명성황후를 숭배하고자 규슈의 어느 분이 기증했다고 한다.
이는 아마 명성황후를 살해한 40여명의 낭인들 중 대부분이 규슈지역 출신인데, 그 중 한 명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마음으로 노년에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청동으로 된 관음상은 태평양전쟁에 바쳐졌고 그 후 이를 대신하기 위해 돌로 다시 새겨 놓은 보살상이 절신원에 안치되어 있다.

  
[주소] ?812-0037 후쿠오카현(福岡市) 하카타구(博多?) 코쿠쇼초(御供所町)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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