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중원대 교수)

▲ 이상주(중원대 교수)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이 1722년 호남지방을 여행하고 찍은 동영상이 발견됐다. 그의 세거지는 지금의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양촌이다. 그는 1722년 10월 13일부터 12월 18일 까지 호남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 여정을 동영상으로 남겼다. 오늘날 캠코더나 핸드폰으로 찍은 동영상은 아니다. 생각이 그걸 해냈다. 그는 오늘날 사진(寫眞)과 같은, 동영상 같은 글을 쓸려고 생각했다. 그는 그걸 현실화할 식견(識見)이 있었다. 그에겐 ‘온고지신’이라는 캠코더가 있었다. 그 캠코더는 중국 송나라 육유(陸游)의 ‘입촉기(入蜀記)’와 명나라 서굉도(徐宏祖)의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였다. ‘입촉기’는 촉나라 땅을 여행한 기행문이다. ‘서하객유기’는 중국 각지방을 여행한 여행기이다. 그는 여행기 작성의 기본을 주로 두 책에서 배웠다. 그리고 그는 기존의 시문창작론을 온고지신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 이런 독서경력도 동영상을 찍는 방법을 터득하게 했다. 그는 ‘남행집서’에서 호남기행시 창작원칙을 피력했다. ‘사경야진 도정야실(寫境也眞 道情也實)’, 즉 ‘경치를 묘사할 때는 참되게, 감정을 말할 때는 충실하게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그 시를 읽으면 진짜 그 땅을 밟고 그 말을 받들며 마주 대하는 듯하게 했다. ‘남유록서’에서 호남기행일기 기술원칙을 정했다. ‘여행길에 견문한 내용을 신수사거(信手寫去)했다.’ 신수사거는 풍부한 학식과 수련을 통해 의도하지 않고 손가는 대로 글을 써도 그 내용을 적합한 어휘로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노련한 문장력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호남기행일기 “남유록”을 읽고 기행시집 “남행집”을 읽으면 오늘날 동영상을 보듯이 현장감과 생동감이 느껴진다. 그중 중요한 내용을 소개한다. 11월 23일 일기의 내용이다. 지금 장흥군에 있는 보림사에서 ‘춘면곡(春眠曲)’을 청취했다. 이희징(李喜[羲]徵)이 춘면곡을 지었는데, 당시 호남사람들이 춘면곡을 ‘시조별곡(時調別曲)’이라했다. 춘면곡은 그 당시 강진에서 창작되어 호남지방에 유행하다 그 후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이하곤의 “남유록(南遊錄)”은 시조(時調)라는 용어가 보이는 현존 최초의 문헌이다. 춘면곡은 조선후기 12대 가사(歌詞)로 유명하다. 따라서 여기서 별곡(別曲)은 가사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 시조는 노래의 유행양상을 표현한 말이다. 즉 ‘時調’는 당시(當時)에 유행하는 곡조(曲調)를 줄인 것이다. 그 반대는 고조(古調)이니 즉 ‘흘러간 옛노래이’다. 율곡의 ‘고산구곡가’의 ‘고조’가 바로 그 뜻이다. 12월 12일 일기에 전주지방의 ‘삼불여설(三不如說)’을 기록했다. 그 외도 당시의 생활풍속을 기록했다.
  우리는 이하곤이 찍은 진(眞)과 실(實)한 사진과 동영상 덕분에 당시의 현실을 생생하게 알 수 있으니, 이하곤은 높은 문학적 식견을 시문학에 실천한 결과 불후의 동영상 속의 불후의 인물로 남게됐다.
  현재까지 특정지역을 여행하고 그 견문을 시와 기행일기 등 2 개의 문학 갈래로 남긴 사례는 드물다. 특히 호남지방을 여행하고 남긴 사례는 더욱 드물다. ‘남유록’과 ‘남행집’은 ‘1722년 호남지역인문지리보고서’다. 필자는 이하곤이 다녀온 여정을 두 번 답사하여, 천연색 사진을 찍어 “18세기초 호남기행”이라는 번역집을 2003년 발간했다. 그리하여 이하곤의 꿈꾸던 사진(寫眞)같은 호남기행을 완성했다. 그러나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동영상을 찍지는 못했다.
  공자를 본받은 사람은 맹자가 되었고 두 사람을 본 받은 사람은 주자가 되었다. 세 사람을 본받은 이이, 이황, 이문건등은 불후의 인물이 되었다. 이제현, 송상현은 어진 사람을 본받는다는 이름값을 했다. ‘승기자염지(勝己者厭之)’ 즉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해 선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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