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민들은 요즘 헌정 사상 ‘초유의 일’들을 너무나 많이 겪고 있다. 낯선 미답의 그 길이 긍정적 의미라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도무지 낯 뜨거워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그런 부정적 일들이니 국민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그만큼 깊고 크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하야하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 때문이었다. 닉슨 행정부가 베트남전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민주당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권력남용으로 도청을 시도하다 발각된 것이었는데, ‘최순실 스캔들’과 비교하면 ‘미미’하기 짝이없었던 그 사건이 대통령 하야까지 가게 된 것은 거기에 ‘거짓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은 정치인에게, 특히 지도자에게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거짓은 더 큰 거짓을 낳게 마련이다. 또 그런 거짓으로 거짓을 덮으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적 진실은 더 큰 태풍으로 다가와 파국을 이끈다.
박근혜 대통령이 2차 대국민 사과를 하며 “필요하다면 저 역시 검찰의 조사에 성실하게 임할 각오이며 특별검사에 의한 수사까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들 대통령의 말 가운데 ‘필요하다면’을 이렇게 해석했다.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마련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국민과의 약속은 “대통령인 저 자신에게 필요하다면 검찰 조사에 응할 것”이라는 뜻이 아닌, “검찰이 조사에 저를 필요로 한다면 응할 것”이라고 해석돼야 마땅하다. 이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주어는 ‘대통령’이 아닌 ‘검찰’이기 때문이다. 대국민사과를 하는 마당에 어느 누가 “저에게 필요한 때에만 한정해서 검찰조사에 ‘성실히’ 응할 것”이라는 ‘비문(非文)’을 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통령은 거짓말을 했다. 문맥 속에 들어있는 거짓말이야 너무도 많아 열거하기 힘들지만 대략 살펴보면, “선의의 도움을 주셨던 기업인”은 “대통령이라는 막강한 권력에 두려움을 느낀 기업인”으로,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는 “국정에 대해 컨펌을 받아야할 만큼 존경하는 최 선생님(순실)을 맹목적으로 믿고 권력을 통해 돈 뜯어내는데 엄격했던 결과”로 바뀌어야 한다.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는 “100만 촛불이 아니라 5000만 촛불이 타오른다 해도 대통령직 유지를 위해선 갈데까지 가볼 각오이다”로 고쳐 적었어야 한다.
대통령의 말대로 검찰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명명백백하게 진실을 밝히고 이를 토대로 엄정한 사법처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조직의 명운을 걸고 수사한 결과 또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피의자 대통령을 둔 국민은 참담하다. “녹음파일 10초만 틀어도 촛불이 횃불로 바뀐다”는 검찰 고위관계자의 말을 보면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대통령의 ‘비정상적 행위’가 무엇일지 두려움마저 든다.
내일(26일) 광화문에서 다시 촛불이 타오른다. 200만을 예상한다고.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저 촛불을 대통령은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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