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희 <착한어린이신문 발행인>

 

40여년의 교직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초임지에서 벌어졌다.

내가 부임한 학교는 청주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정도 가서 그곳에서 다시 10리를 더 걸어가야 하는 오지학교였다. 당시 화가가 꿈이었던 나는 수업이 끝난후면 자취방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했다. 도시생활을 접고, 가족을 떠나 외롭게 생활하던 내게 그림에 빠지는 시간은 유일한 위로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내가 그림의 매력에 푹 빠져있을 때 일어난 황당한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터져 나와 박장대소를 하게한다.

그 날도 수업을 끝내고 그림을 그릴 생각에 부리나케 자취집 대문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며 다가오셨다.

“선상!(선생) 선상! 큰일 났어. 이 동네 여편네들이 선상을 동네에서 내쫓는다고 한패 몰려왔어!”

무슨 소리인지 황당했다. “글쎄 말여, 동네사람들 말이 선상이 요상한 거를 믿는 교주라메? 선상 방에다 신당을 차리고 밤마다 기도를 한다고 하던데 워떠케 된겨?”

갑작스런 소란에 멀뚱거리고 있는데 담 밖에 몰려와 있던 동네사람 몇몇이 소리를 지르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한아주머니가 “방문을 열어 보면 알거 아녀” 하고 앙칼지게 소리치자, 또 다른 한 사람은 빨래방망이를 들고 온 폼이 금방이라도 나를 때리거나 방문을 때려 부술 기세였다.

“얼른 방문 열어봐.” 주인아주머니의 재촉에 자취방의 방문을 열자 방안을 들여다보던 주인아주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시상(세상)에 저게 다 뭐야. 말세네 말세여. 나는 그래도 선상을 그렇게 안 봤는데. 저 요상한 것들이 다 뭐여? 얼른 당장 저것들 들고 내 집에서 나가!”

주인아주머니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내 등짝을 두들겼다. 동네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와 내 방을 들여다보더니 비명을 질렀다.

“에구머니나, 아유 흉측해라 꿈에 나타날까 무섭네.” “역시 소문이 맞구먼.”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뿔싸! 난 그때서야 상황이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만요, 제 말을 듣고 때려 부수든지 내 쫓으시든지 하세요.”

상황은 이랬다. 동네 아줌마들이 “저 허연 흉물단지 귀신들이 신이 아니면 뭐여” 하는 것들은 줄리앙과 아그리파 등의 석고상이었고, “저 지게 같이 생긴 요상한 물건은 뭐여” 하는 물건들은 이젤과 화판에 목탄으로 데생한 그림이었다. 또, “저 선반 위 올려놓은 음식은 제를 지내기 위해 놓은 것 아녀?”라고 말한 음식은 내가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놓은 사과, 배, 양파 등의 과일과 목탄데생 명암조절을 위해 지우개용으로 쓰는 식빵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냈던 좁은 방 한 칸이 마치 지청(사당)같은 느낌을 풍기는 것 같았다. 석고상을 높이 올려놓기 위해 겹쳐놓은 아동용 책상들과 지저분한 공간을 메우기 위한 흰 광목 천들이 늘어져있어 분위기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천장과 벽에 명암을 관찰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조명도 더욱 방의 분위기를 신당처럼 기기괴괴하게 했다. 더군다나 밤마다 그림 그린답시고 석고상의 비율과 기울기를 재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목탄을 손에 쥐고 그림을 그리던 모양새는 마치 신께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였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그들이 묻는 것에 대답하다보니 내 모습과 생소했던 이 방의 물건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짐작이 됐다.

문화의 차이를 실감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다. 모두가 떠난 그날 밤, 나는 실소를 금치 못하며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 세상을 재단한다는 사실을. 나 또한 남들이 볼 때 그러한 사람으로 보여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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