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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인 교육 통해 영혼의 탈식민화 이뤄야”
“다층적인 교육 통해 영혼의 탈식민화 이뤄야”
  • 박장미 기자
  • 승인 2016.11.27 2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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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인문학 특강 5
▲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 동양포럼 주간 김태창 박사는 지난 10월 4일 오전 충북도교육청 화합관에서 교육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 10월 4일 충북도교육청 화합관에서 교육청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김 주간은 오랫동안 국내·외 교육계에 종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자신의 소감과 소견의 일단을 피력했다. 또 서너살 어린시절의 추억부터 시작해서 격동하는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었던 일들이나 미국,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있었던 귀한 만남, 거기서 이뤄진 자기형성-인간형성-에 얽힌 사연들을 이야기 했다. 그 내용을 수정·보완·정리해 싣는다.<편집자>

여러분, 이렇게 만나뵙게 돼 반갑습니다. 오늘 여기서 여러분과 함께 교육의 문제를 생각하고 제 스스로의 교육체험과 교육관에 대한 견해의 일단을 말씀 올리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배우고 배운바를 가지고 대화 나누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한학(중국 고전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할아버지께서 산골에서 서당의 훈장을 하셨고 거기서 저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한문공부를 했습니다. 아마도 세 살이나 네 살이 되었을 때부터였다고 추측됩니다. 일본말을 배우고, 써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했던 시절에 그것이 싫어서 한문을 가르치고 중국고전에서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하려는 것이 할아버지의 아주 작은 항일 투쟁의 방식이요, 그 나름의 구국의 실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대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臣民)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서 멸사봉공하는 것이 최대의 인간적 책무라고 가르치는 조선총독부의 교육지침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줄도 모르고 그저 할아버지가 가르치시는대로 중국고전에서 따온 좋은 문장들을 무작정 암기하고 그 뜻을 되새기고 또래 아이들과 이리저리 다니면서 노는 가운데서도 가끔 말다툼이 있게 되면 어설프게나마 익혀둔 한문지식을 바탕으로 자기 정당화를 꾀했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현실에서 동떨어진 생활과 교육에 반발해서 일본의 중심지인 동경에 가서 사업을 일으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 끝에 크게 성공해서 우리집과 근친들의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일본으로 데려갔고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때까지 동경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도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마저 식민지화 되지 않고 많은 세월이 흐르고 많은 체험학습을 저자신이 이름 붙이게 된 글로내컬 식민성의 기초가 저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체감·체인·체득되었던 것 같습니다. 글로내컬이란 말은 저 자신이 만든 말인데 글로벌(전지구적)×내셔널(국민·국가적)×로컬(지방적·생활현장적)이라는 말들의 합성어로서 인격형성의 세 개의 차원이 서로 융합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그것이 격화되고 일본의 패전과 붕괴의 조짐이 여러 가지로 체감되기 시작할 무렵-그러니까 1944년 봄-에 할아버지의 강력한 엄명에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5남매가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듬해,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고 조국의 광복이 현실이 됐습니다. 저는 일본말과 일본적 교육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말과 우리 겨레의 얼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야 했는데 어릴때부터 암기해 두었던 한문지식이 대단히 유용했습니다. 거기다 중학교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영어와 고등학교부터 배운 독일어, 프랑스어가 일본어를 기억에서 철저하게 추방해 버렸는지 거의 완벽하게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중언어 문화생활을 통한 인격형성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우리말과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의 습득과정을 통해서 다중언어문화의 인격형성으로 바뀌었으며 대학 졸업후에 미군부대에서 통역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고등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줄곧 유지, 강화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주한미국경제협조처라는 미국연방정부의 기획보좌관으로 한국정부와 미국정부사이에서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미국의 경제원조를 조정·추진·점검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충북대학으로 직장을 옮겼고 그 당시에 교수 충원이 아직 미비하였기 때문에 약학과에서 라틴어를, 화공과에서 영어를, 미술과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정치외교학과와 행정학과가 신설되면서 국제관계론과 행정철학을, 그리고 교양과목으로 인류문화와 지구사회라는 과목을 신설해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대처할 수 밖에 없는 대학의 사정이 있었고 저는 그저 대학의 요구에 성심껏 대응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그전부터 가끔씩 생각했던 해외유학의 기회가 주어져서 처음에 미국으로 갔고 이어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연구활동을 하게되고 우리나라와 여러나라 사이를 왕래하면서 언제나 어디에서나 새로운 만남과 사귐을 통한 새로운 학습과 연구와 생활체험을 통해서 교육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저 나름의 소감과 소견이 서서히, 그러나 확고하게 정립되어온 것 같습니다. 저 스스로가 깨달은 교육이란 선생이 학생을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키우는 ‘교육’-가르칠 교(敎), 키울 육(育)이라는 두 개의 한자로 이루어진 한어 敎育-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서로 배우고 함께 생각하고 더불어 미래를 열어가는 미래공창의 끝 없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삶을 함께하는 슬기를 배우고 삶다운 삶의 뜻을 함께 생각하고 보다 나은 삶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함께 꿈꾸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좌절과 희열을 함께 하는 삶의 나그네 길입니다. 거기서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사건이나 물건과 인연을 맺게 되느냐, 누구의 인생에나 어떤 결정적인 만남의 계기가 있게 마련이지만, 거기서 과거가 다시 자리매김되고 현재가 다시 뜻매김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가 그 모습을 갖추게 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저 스스로가 어느새 지나가버린 83년이라는 인생역정을 되돌아볼 때 ‘그때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던 일’이 늘 저의 지난 날을 되돌아 봄으로써 현재와 연결되는 맥락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해주었고 지금의 스스로를 새롭게 다짐하게 해주었으며 내일의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게 해주었다는 것이 생활체험을 통해서 체득한 값진 교훈이라는 실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통해 배우고 익힌 한문독해력과 한자적 상상력이 너무나 멋진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열쇠가 되었음을 늘 체감해 왔습니다. 우리의 과거, 그러니까 우리나라와 우리 겨레의 역사는 물론 그것과 여러모로 연결돼 있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가 모두 한자 문헌속에 농축되어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새 밝힘 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한문 독해력과 한자적 상상력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추진 중에 있는 한·중·일이 함께 공공(公共)하는 철학대화운동을 펴나가는데 있어서도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편이 한자적 표현력입니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우리문화와 역사, 사상과 철학, 그리고 문학과 예술을 알리는 일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주 체험·증험·효험 했습니다. 그것은 무한대의 한문고전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동아시아 인문학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처음으로 제 손에 쥐게 해주신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저의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저는 중학교때의 영어선생님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를 너무나 잘 대해주셨고 무엇보다도 영어가 미래 세계를 열어가는 열쇠임을 일깨워열 주셨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의 제자사랑에 정성껏 보답하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화장실 벽에다 그날 그날 외워야 될 영어단어를 적은 것을 붙여놓고 그것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확신이들 때 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서 식구들의 불만불평을 사기도 했고 영어문장을 머릿속에서 되새김하느라 정신을 잃고 걸어가다가 길가의 전봇대에 부딪혀서 상처를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 때문에 저의 영어공부의 열의가 약해질까 염려해서 저에게 용기와 생기를 불어넣어 주신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귀한 인연이 그 후에 저의 삶과 학문과 인간형성에 얼마나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 주었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깊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저는 어려운 고비를 겪을 때 마다 영어가 힘이 되어주었고 저의 사회 생활의 새로운 차원이 열릴 때 마다 그것이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심지어 종교적인 차원에 관계되는 경우에도 늘 영어적 표현력과 교양과 상상력이 결정적인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저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체험에 입각한 견해를 말씀드리면 20세기의 세계는 영어가 주도하는 세계였습니다. 영어공용권이 앞장서는 세계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국영어가 문명의 핵심을 형성했고 영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계 무대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무기한의 여권을 처음으로 제게 주셨던 분이 중학교 때 만난 영어선생님이셨습니다. 물론 그후에 세계의 도처에서 만난 참으로 고마운 사람들에게도 고마움을 느끼지만 최초의 만남이 갖는 의미는 더 없이 깊고 진합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얼마 안되었을 때 나중에 서울대 법학과 교수가 되신 선생님이 잠시 청주고등학교에 와 계셨는데 그 분이 가르치신 독일어는 그냥 어학교사가 아닌 독일어적 교양 같은 것을 깨우쳐 주는 교육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저를 끔찍하게 아껴주셨습니다. 저는 독일어를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책을 파는 행상으로부터 헤르만 헤세의 작품집 몇 권을 싸구려로 사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읽은 것이 ‘크눌프’라는 작품이었고 연달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중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접하게 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가서 특히 니체에 심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런것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부 독일어 원본을 구해서 읽을 수 밖에 없어서 불편했지만 오히려 진정한 독일적 교양(=인간형성)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서유럽이 아닌 동유럽 여러나라에서 철학대화를 할 때 독일어가 얼마나 큰도움이 되었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독일어로 매개된 세계는 영어가 주도하는 세계와 관련되면서도 대단히 다른 내면의 세계를 펼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때 세계를 물질문명으로 일원화하려는 영어제국주의에 대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으로 독일적 인간 형성의 정신문화, 특히 독일철학과 독일음악에서 찾으려 했고 그 후에 프랑스어를 습득해서 프랑스어로 이루어진 프랑스적 지성·양식·이성의 또다른 세계를 알게되면서 대안의 다양화·다중화·다층화를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애초부터 독일인이 창안하고 소련에서 실험되었던 이른바 볼셰비즘적 인간형성, 막스·레닌주의적 계급투쟁의 혁명의식으로 무장된 소비에트적 인간형성에는 여러모로 공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국적 자본주의 대 소련적 공산주의의 대비나 거기서 과학적 사회주의 우월성을 학습·실천·선전화 하는데 역점을 두는 다양한 교육담론에는 반발심을 가졌습니다. 거기에는 일본군국주의의 ‘멸사봉공’과 비슷한 생명경시의 사상경향이 감취되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그려온 바람직한 교육은 -교육이라는 말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여기는 충북교육청이므로 여러분과의 공감을 진작시키기 위해 교육이라는 말을 씁니다만- 무엇보다도 먼저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을 함께 낳고, 키우고, 알차게 하는 인간형성의 끝없는 과정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영혼의 탈식민지화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어느나라, 어느 민족보다도 악랄한 제국주의적 식민지화의 피해와 고통을 몸소 겪었습니다. 나라 땅을 몽땅 빼앗기고 정치·경제·문화·사상 그리고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온통 강도질 당하고 비틀어지고 마침내 말살되었습니다. 생명의 힘과 열과 빛이 고갈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나라밖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던 진천출신의 포석 조명희 선생이 조국의 참상을 견디면서 울부짖었던 절대절명의 절규였습니다. 그런가운데서도 조국의 광복을 위한 피나는 투쟁을 계속해온 수많은 선각자들의 덕택으로 정치적·법률적 독립은 이루어졌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인 자립과 자주가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혼의 탈식민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무엇인가에 의해서, 영토화·식민지화된 영혼은 개인의 비극에 끝나지 않고 조직이나 단체, 공동체, 사회 그리고 국가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각계 각층의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이 특정 이데올로기나 거짓종교의 철저한 지배를 받는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것이 가져오는 반생명적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이 심대할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하고 다층적인 교육을 통해서 개개인 영혼의 탈식민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 자신의 교육철학입니다.

그래서 저는 몇년전부터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에서 특히 젊은세대와의 진솔한 대화를 나눌때는 이태리의 유명한 영화음악 작곡가인 엔니오 모리꼬네가 곡을 만들고 키아라 페라우가 노랫말을 붙이고 세계적인 유명가수인 사라 브라이트만이 노래불러 지구적인 인기를 끈 바 있는 ‘넬라판타지아(환상속에서)’’라는 노래를 함께 듣고, 부르고, 노랫말의 뜻을 되새김하는 일부터 시작하곤 합니다. 이태리어 원문의 리듬과 정서를 그대로 감득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운 어감을 살린 번역을 소개 하겠습니다.

“나는 환상속에서 모두들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봅니다. 나는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깊숙한 곳까지 인간애로 충만한 영혼을…. 나는 환상 속에서 밤조차도 어둡지 않은 밝은 세상을 봅니다.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깊숙한 곳까지 인간애로 충만한 영혼을…. 환상속에서는 친구처럼 평안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저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깊숙한 곳까지 인간애로 충만한 영혼을….”

세계적인 가수들이 다투어 불렀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유명한 음악인들이 불렀으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습니다. 저는 이 노래와 특히 노랫말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의 기본적인 인생관과 세계관,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교육의 참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나와 너와 그(녀)가 함께 부를 수 있는 아주 좋은 노래이기 때문이며 함게 꿀 수 있는 꿈이 있으며 그것이 그리는 미래·미완·미결의 세계를 함께 열어가는 항상 자유로운 영혼, 말끔하게 탈식민지화된 영혼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청년이 다섯 살때 고아원을 뛰쳐나와 껌팔이로 연명하며 공중화장실에서 잠을 자고 돌아갈 곳도, 기댈만한 사람도 없이 가난과 배고픔과 외로움을 혼자서 견뎠습니다. 오직 노래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끈질긴 꿈으로 역경을 견뎌낸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죽을힘을 다하고 있는 젊은 음악지망생을 만나게 됩니다. 둘은 함께 삶을 엮어가는 가운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시련을 이겨냈고 마침내 거지소년은 그 놀라운 음악적 천품을 인정받아 그것을 가지고 많고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를 무조건 돕고 키워낸 음악청년도 너무나 훌륭한 팝페라 가수가 되어 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깨우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가 된 거지소년은 최성봉씨이고 그를 도와 키워낸 사람은 박정소씨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누가 불러도 좋아하지만 특히 최성봉씨나 박정소씨가 부르는 것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삶의 뜻을 새 밝힘 하게 되고 삶을 제게 주신분에게 고마움을 다시 느끼게 되며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의 깊은 유대와 서로의 인간애를 재삼 확인하게 됩니다. 단 한번만의 삶이지만 그것이 저에게도 주어진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큰 기쁨입니다. 가진거라고는 음악에 대한 열정밖에 없어서 그것을 함께 나누다보니까 거지소년도 음악학도도 함께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축복을 함께 받게되었다는 박정소씨의 증언이야 말로 참다운 교육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공복(共福)’이 아닌가라는 확신이 듭니다.

저는 여기에 교육이라는 인간적 영위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뵙고 말씀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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