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유 <보은교육지원청 교육장>

 

1982년 4월 1일 교직에 입문해 세 번째 학교로 발령받은 곳은 바로 인근 학교였다.

대개 발령을 받게 되면 새로운 학교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 기대감이 앞서게 되는데 출근 첫 날 뜻밖의 일을 당해 당황했다.

출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교무부장님이 앞으로 3일간 할 일이라고 내 놓는 쪽지에는 오늘은 과학실 실험도구 정리 및 청소, 내일은 창고 정리 및 청소, 모레는 체육 창고, 자료실, 기타 정리 및 청소로 되어 있었다. 기분을 잡친 나는 “교사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공부하면서 지내야지 이게 뭡니까?”라고 대들었지만 돌아 온 답변은 교장선생님의 지시니 항의하려면 교장선생님께 하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리고 있는데 먼저 와 근무하고 있던 친구(작고)가 살짝 다가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자기도, 먼저 온 다른 선생님들도 다 교장선생님의 뜻에 따라 ‘정리’ 와 ‘청소’를 했다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은 화장실(옛날 재래식) 인분까지 실습지, 화단에 주었다고 하는데는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과학실의 실험기구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걸레로 닦고, 정리를 시작했다. 실험기구가 망가지고 깨지고 라벨이 떨어지고 어수선한 과학실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실험기구의 위치와 상태를 확인하면서 주어진 일을 마쳤다. 일반 창고, 체육 창고, 학습 자료실 등 교직 사상 초유의 작업으로 지시받은 3일간의 일정이 지나갔다. 4월 초의 쌀쌀한 날씨 탓도 있고 첫날 황당하게 마주한 일에 기분 좋지 않게 출발하였지만 정리하고 나서 돌아보니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고 싶어 한 일이 아니라 지시에 의한 것이어서 내내 기분이 착 가라앉은 상태로 나의 교직생활은 시작되었다.

정리를 다 마친 날 오후, 교장선생님께서 3일 동안 수고했다면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 어린 교육 부탁과 교사로서의 근무 자세 등등 그리고 말미에 자기발전을 위한 무한한 자기 연찬을 주문하셨다. 교장선생님 말씀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교장실을 나와 같이 근무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빨리 다른 학교로 갈까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근무하면서 왜 그런 일을 부임과 동시에 시키셨는지 알게 되었다. 작은 학교이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과학실 업무 보조는 꿈도 못 꾸고 모든 것을 교사가 챙겨서 수업을 해야 했다. 실험기구 및 시약 등등 모든 것이 한눈에 파악되지 않으면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한 사람의 수고로 정리가 되니 쉽게 수업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수업에 필요한 자료, 실습시간에 사용할 농기구 등등 모든 게 낯설지 않고 있을 자리에 있으니 수업준비도 빠르고 수업도 알차게 할 수 있었다. 과학 수업 시간에 실험 도구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자료실에 어떤 자료들이 있는지 확실히 알게 돼 유용하게 쓰게 됐다. 있는 자료를 십분 할용 할 수 있어 마음이 뿌듯했다. ‘아, 여기에 교장선생님의 뜻이 담겨 있었구나!’ 뒤늦게 교장선생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교직 인생의 전환점을 주신 분도 바로 이 교장선생님이시다. 그 분의 권유로 34년 전에 과학잡지 ‘사이언스’를 구독하며 컴퓨터, 소재공학, 생명공학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누구보다 먼저 컴퓨터를 접하고 대학원에서 컴퓨터교육을 전공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처음 나왔던 삼성의 SPC-1000, 금성의 패미콤도 학교 교비에서 사주셨다. 지도했던 김수환 학생이 퍼스널컴퓨터경진대회(군대회, 도대회)에서 1등을 하여 중앙대회까지 출전하게 되었던 것도 교장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황해도에서 월남, 항상 고향을 그리워하시던 교장선생님은 10여 년 전에 작고하셨다. 남다른 사명감과 소명의식으로 교직에 봉사하신 분으로 항상 공부하셨고, 공사가 분명하신 분으로 융통성이 좀 부족하다싶을 정도로 원칙을 지키신 분이셨다.

반면에 다정다감하신 분이어서 오토바이 출퇴근을 하는 나에게 가죽 장갑과 머플러를 사주시며 추운데 안전하게 운전하라고 다독여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없어진 보은의 작은 사직초등학교 재직 때의 이야기이지만 ‘잊을 수 없는…’ 코너의 주인공으로 모셔 과거로의 여행을 다녀왔다. “이운봉 교장선생님 감사합니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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