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 김영이(동양일보 편집상무)

괜히 켰다. 이런 소리 들으려고 TV를 켜진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 번째 대국민담화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국회)에게 떠넘기는 졸작에 불과했다. 1, 2차 대국민담화가 실망만 안겨 준 것에 대해 기름만 부은 꼴이다.
박 대통령은 29일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한 것이다. 탄핵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박 대통령이 국회에 공을 넘긴 것이다. 이어 정치권이 논의해 국정이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정치권 합의로 만든 일정에 따라 퇴진하겠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임기를 줄이거나 물러날 수 있다고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입장변화는 자신을 포위한 상황 탈출이 쉽지 않은데서 기인하고 있다. 검찰에 입건돼 있는 상태에서 특검까지 받아야 하고 주말마다 하야·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민심을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또 야권의 탄핵추진에 비박계 의원들이 가세하면서 빠르면 이번주 중 직무정지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작용했음직 하다.
여기에 정치권 원로들의 내년 4월까지 질서있는 퇴진 요구에다 친박계 중진들의 명예퇴진 건의도 외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3차 담화엔 보다 좀 더 솔직하고 현 난국을 타개하는 진솔된 내용이 담겨 있길 바랐다.
1, 2차 대국민사과가 국민들을 철저히 배신했기 때문이다.
박대통령은 지난달 25일 1차 대국민사과 성명에서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해 “최순실 씨로부터 일부 연설문 표현을 도움을 받았지만 좀더 세심히 살피겠다는 생각이었을 뿐”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역시 사전에 녹화된 사과로 질의응답까지 받지 않으면서 국민을 농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검찰 수사 결과 최씨는 지난 4월까지도 연설문과 홍보물을 받아 본 것으로 드러났다.
촛불민심이 사그라들지 않자 박 대통령은 지난 4일 2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검찰 조사는 물론 특검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바빠서라는 이유를 댔다. 박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검찰이 요청한 대면조사에 협조할 수 없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급하게 돌아가는 시국에 대한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특검을 임명해야 하는 등 일정상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였다.
이로써 대통령의 검찰 조사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검찰은 대통령을 직접 조사하지 못한 채 수사를 마무리하게 됐다.
3차 대국민담화를 놓고 여·야의 반응은 당연히 극이었다. 담화직후 정진석 새누리 원내대표는 “야당에 탄핵일정의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탄핵 흔들기를 위한 일사불란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
야당의 반응은 격앙됐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탄핵 교란책이자 탄핵 피하기 꼼수라고 비난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계산된 퉁치기라고 일갈했다.
박 대통령이 국회에 공을 넘긴 것은 개헌을 둘러싼 야당간의 이간질, 탄핵을 둘러싼 여·야간의 쌈박질을 노린 노림수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당장 탄핵의 키를 쥐고 있는 비박계 기류가 문제다. 친박계가 대통령이 퇴진의사를 밝혔는데 굳이 탄핵할 이유가 있느냐는 논리를 들이대면 비박계의 탄핵 전선에 균열이 생기게 될 것이다.
정치권 원로들이 4월 시한의 명예로운 퇴진 요구도 보수재집권 로드맵과의 관련을 따져 보아야 한다. 일각에선 반기문 사무총장을 위한 시간벌기가 아니냐고 의심한다. 대선 일정이 빨라질수록 여론조사 1위에 오른 문재인 전 대표에 유리한 형국이다. 막연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보수쪽의 문재인 견제 시나리오일수도 있다.
박 대통령은 3차 담화에서 감성으로 호소했다. 18년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 했던 여정, 제 가슴이 더욱 무너져 내린다,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검찰에 의해 피의자 신분이 됐는데도 아무런 변명도 없었다. 퇴진과 하야, 심지어 구속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나온 대국민 담화 치고는 실망 그 자체였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박 대통령의 3차 담화를 이렇게 한 줄로 요약했다. ‘나는 아무 잘못 없지만 국회에서 여·야가 날 쫓아낼 시점과 방법에 합의하면 법에 따라 쫓겨나겠다.’ 다시말하면 나는 여전히 대통령이며 국회에서 합의 못하면 임기 채우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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