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논설위원/충북대 교수)

▲ 권수애(논설위원/충북대 교수)

 지난 토요일 올해 들어 첫 눈이 내렸다. 시국을 걱정하는 국민들의 촛불 집회가 이어진 날이어서인지 눈 내리는 모습이 예년처럼 즐겁고 정겹기보다 답답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촛불집회를 거듭할수록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150만 명이 넘었다고 추산하는데 들끓는 마음에 비해 차분하고 성숙된 행동을 보여 준 국민들의 시민의식은 놀라웠다. 그 시간 나는 독일아리랑이라는 뮤지컬 공연을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관객과 호흡을 함께 하며 펼치는 배우들의 노래와 춤과 연기에 푹 빠졌던 시간이었다. 녹화가 아닌 생생한 무대예술의 매력에 매료되면서 어려움을 극복해나가는 한국인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독일아리랑을 기획한 프로듀서는 한?독 수교 130주년 기념과 근로자 파독 5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영감을 얻어 그분들의 값진 노력과 아름다운 희생을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오래 기억되게 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라고 밝혔다. 60년대 경제적 빈곤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 선택했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애환을 담아냈다.
  낯선 타국에서 독일어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해 화장실에 숨는다 하여 화장실 간호사란 별명과 비웃음을 들으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악착같은 마음으로 견디고 버티어낸 간호사. 정성을 다해 환자를 돌본 결과로 인정받는 코리언의 엔젤이 되는 과정에서 은근과 끈기의 자랑스러운 민족성을 그려낸 장면들에 나라를 구했다는 수식어가 붙여졌다. 파독 간호사로 일해 모은 돈으로 20대에 정원 딸린 주택을 사고, 자식과 부모로써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던 40여 년 전 이웃사촌의 소식이 새삼 그리워졌다. 사회초년생 시절 작은 어려움을 토로하던 나에게 어른스러운 위로와 충고를 해주던 동년배의 그녀가 어떻게 그런 자신감과 지혜를 얻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열기와 먼지가 가득해 앞을 보기도 힘든 지하 천m가 넘는 갱도에서 일하던 파독광부들을 두고 공연 포스터는 기적을 캐냈다고 표현하였다. 갱이 무너지지 않도록 받치는 작업도구가 자신의 체중에 육박하는 무게를 지고 힘든 노동을 견딘 광부들, 가까이서 사고로 목숨을 잃는 동료들을 보며 가슴 미어지던 타국의 생활은 인내의 시험대였던 것 같다. 사고현장에서 혼자 탈출하지 않고 남은 사람을 구하러 자신의 위험을 담보하고 갱도로 다시 들어가는 한국인의 희생정신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몰사고 시일이 경과하면서 다들 구조를 포기하려 할 때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갱도 책임자의 만류를 뒤로하고 동료를 구출하는데 성공하는 극적인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나가 되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외국에 나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열심히 일하고 난관을 극복한 이들이 오늘의 한국 경제를 이끈 견인차가 되었음을 재삼 확인해 주었다. 이런 외국에의 인력 수출이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룬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60년대 말 우리나라에 처음 미니스커트를 소개한 것으로 알려진 칠순의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와 출연진이 합창한 독일아리랑의 여운이 내 머릿속에 길게 남아 있는 것은 그 시대를 함께 공유했다는 감성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또 다른 고난의 시대를 맞고 있다. 그간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수출이 하락세로 돌아서는데 이를 대신할 미래의 성장동력은 아직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저출산 고령화로 경제인구가 급감하고, 사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여기에 안개 속 같이 뿌연 정치적 상황이 겹쳐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난국이 있을 때마다 온 국민이 단합된 힘을 모아 슬기롭게 헤쳐 온 저력을 가지고 있다. 아리랑은 다양한 가락과 가사로 일상생활에서의 애환을 그리며 전승되어온 전통 민요이다. 체념의 하소연과 강한 삶의 의지가 표명된 노래라고도 한다. 아리랑에 담긴 노래의 힘처럼, 촛불집회에 모인 시민들이 문화제를 보고 들으며 실망과 분노의 마음을 달래고 새로운 삶의 동력을 얻기를 바란다. 하루 빨리 혼란한 정국을 벗어나 국민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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