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길형<충주시장>

 

지난달 증평에서 충북도 시장·군수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오후 4시경 증평에 도착하게 되어있었는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됐다.
“증평에 오시는 길에 들렀다가세요.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증평소방서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장님이 눈짓을 하며 “가보셔야지요?”라는 말에 나는 따라 나섰다. 소방서 회의실로 들어가니 아버지 사진이 그 곳에 있었다.
아버지는 증평소방서 창설서장이셨다. 회의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역대 소방서장의 사진들 그곳 맨 앞자리에 정복을 입은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애써 표시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무슨 말이든 하려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서장님은 나를 소방서 마당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버지가 기념식수로 심어 놓으신 주목나무가 아직도 잘 자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나무를 잘 보살펴 주신 것을 보니 아버지는 이곳 직원들에게 존경을 받은 것 같았다.
아버지는 소방관으로서 화재진압 현장에서 허리를 심하게 다쳐 후유증을 겪고 계셨다. 그게 1986년 봄의 일이니 벌써 30년 전 이야기다.
나는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괴산의 전경부대에서 근무 중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큰 부상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게 됐다. 그 당시 괴산에서 충주는 멀고 길도 험했다. 버스로는 세 시간도 더 걸리는 길이었다. 나는 오토바이를 구해 감물과 방곡을 거쳐 살미면을 지나 달리고 달렸다. 이렇게 도착한 곳이 충주 김풍식 신경외과였다.
김풍식 선생님은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환자인 아버지는 숯검정과 흙투성이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수건을 빨아 아버지 얼굴과 머리카락을 닦으며 상황을 파악해보니 약국건물 불을 끄다가 무너진 건물에 깔려 척추가 골절된 것이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고비를 겪는다. 고비를 잘 넘기면 새로운 힘을 받아 버티지만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좌절하는 삶은 재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그 중 큰 고비가 전신마취를 해야 할 정도의 건강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 돌이켜보니 나의 아버지는 전신마취를 다섯 번이나 하셨으니 그 인생의 고비가 몇 굽이였던가?
아버지는 척추압박 골절이라는 어려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 영동소방서장과 증평소방서장을 거쳐 다시 충주에서 정년을 마치셨고 정년 이전에 5남매 모두가 결혼하였으니 성공한 것이다.
그 후로도 열다섯 번 입원하여 모두 회복하고 퇴원했으니 삶의 투쟁에서도 승리하신 것이다.
충주시장이란 중책에 도전하고 시민들을 만나면서 나는 아버지의 품을 확인했다. 살아계셨을 때 느끼지 못한 아버지의 그늘이 돌아가셔서 목벌 하늘나라에 모셔 놓은 후에 드리운 것이다.
“네가 조병섭의 아들이냐?, 열심히 하거라. 우리가 도와주마.”
나는 이런 말씀들을 잊을 수 없다. 그 말들을 간직하며 보다 바르고 정직한 시장이 되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지난해 일이다.
“시간이 나면 지나는 길에 수안보 소방파출소로 들려주세요.”
이런 전화를 몇 차례 받았다. 나는 서늘한 봄날 그곳을 찾았다.
“우리 의용소방대는 그 시절 소방경연대회에서 상을 탔지요. 이 사진이 그때 찍은 것이고 자,  여기 보세요…….”
설명해주시는 의용소방대장님은 한참 젊은 시절의 모습이 선명한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다. 그 당시에는 사진을 그렇게 찍었다. 줄 맞춰 의자 놓고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하고 엄숙하고 단정한 표정으로…….
그곳에 지금 내 나이보다 젊은 소방관이셨던 아버지가 계셨다. 아! 아버지! 아버지는 영동에도, 증평에도, 수안보에도, 그리고 충주의 하늘나라에도 계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동시대를 함께 부대끼며 나라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고, 고생하고,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더 깊이 계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사람은 비석에 남는 것이 아니고, 기념물에 남는 것도 아니며, 더 나아가 어떤 업적에 남는 것도 아닌 사람의 가슴에 남는 것이라고.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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