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 박희팔(논설위원/소설가)

 읍내고등학교 1학년인 보성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조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범골 호랑이얘기 자세하게 좀 얘기해 주세요. 학교 숙제야.” 학교에서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옛날이야기를 알아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할미는 이 마을로 시집와서 들었기 때문에 그냥 대강만 알 뿐 자세한 건 할아버지께서 알고 기실 게다. 할아버지께 졸라라.” “허어, 옛날얘기는 나보담 임자가 더 구성지게 잘하믄서 그러네. 좋다. 내가 얘기해 주마. 대신 약속을 하나 하자.” “무슨 약속요?” “내 시방부터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듣는다고 말이다. 봐라 약도, 이걸 먹으면 확실하게 나을 거라고 믿고 먹으면 효과가 있지만, 먹으면서도 이게 무슨 약효가 있으랴 면서 의심을 하거나 시큰둥하게 여기면 아무리 명약이라도 아무런 효험을 보지 못한다지 않느냐. 그러니 내 얘기도 지어낸 얘기라고 시큰둥하게 듣고 믿지 않는다면 진즉에 그만두려고 한다.” “할아버지, 절대로 안 그럴 게요. 진짜니까 ‘범골’ 이라는 이름이 붙어 내려온 거 아녜요.” “옳지, 맞는 말이다. 근데 너 ‘범’과 ‘호랑이’가 어떻게 다른지 아느냐?” “범이나 호랑이나 같은 말 아닌가요?” “맞다, 그게 그 말이지만 ‘범’이 먼저 나온 순 우리말이고 ‘호랑이’는 ‘범’보다 나중에 한자에서 나와 우리말이 된 거라고 이 할아비는 생각한다. 봐라, 한자어에 ‘호랑(虎狼)’이라는 게 있는데, 이는 범 호(虎)와 이리 랑(狼) 즉 ‘범과 이리’라는 말로 ‘사납고 무섭고 잔인한 걸’ 나타낼 때 쓰인다. 여기서 ‘호랑이’라는 말이 나왔을 성 싶고, 실제로 ‘호랑이’는 범을 무섭고 사나운 뜻으로 쓰일 때 이르는 말이 다.” “할아버지, 국어선생님 하실 걸 그랬어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예끼, 이놈이 할아빌 놀리고 있어.” “그러니까 할아버지, 같은 말인데도 ‘범’ 하는 것과 ‘호랑이’ 하는 것은 그 느낌과 뜻이 다르단 말씀인가요?” “그래, 그래, 그래서 우리 선대들도 ‘범’은 사람을 이롭게 해주고 신령스럽게 여겨 산신령으로 받들었지만 ‘호랑이’는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무서운 짐승으로 여겼지. 지금에 와서는 그 말이 그 말로 휘뚜루 쓰고 있지만 말이다. 자아,  그러면 이제부터 ‘범골’의 내력에 대해 이야기해 주마.”
 마을에서 서쪽 저 멀리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두탯산이고 마을 뒤 가깝게 자리한 산이 함빽산이다. 그런데 두탯산의 수범(범의 수컷)이 함빽산의 암범(범의 암컷)을 찾아 어슬렁어슬렁 와서는 암컷과 어울려 장난하며 놀다 가곤 했다. 이걸 동네사람들은 함빽산 골짜기에 무서운 호랑이가 드나든다면서 가까이 가기를 꺼려했다. 듣기로는 아랫말 최가가 밤에 마을갔다 오다가 함빽산 기슭을 지나게 됐는데 난데없이 뭣이 모래를 흩뿌리는 바람에 등골이 오싹해 집으로 간신히 와 며칠을 식은땀을 흘리며 앓았다 하고, 또 마을초입에 사는 장서방이 아직 먼동도 트지 않은 어두컴컴한 밤에 인분을 내려고 함빡산 아래 밭에 가는데 무엇이 자꾸 모래를 뿌려대 그 후론 다시는 어두울 때는 함빽산 근처는 어리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그게 다 개호주(호랑이 새끼)의 장난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마을에 호환(虎患:범이 사람이나 가축에 끼치는 해)을 당한 일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외딴집의, 환갑이 내후년인 청솔댁 바깥양반이 호랑이한테 물려갔다는 것이다. 마을이 발칵 뒤집히고, 그의 시체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사흘 밤낮을 온 마을의 장정들이 함빽산 일대를 헤매고 다녔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6년 후, 한 지관(地官)이 명당을 찾아 이산저산 헤매다가 함빽산 골짜기를 자나게 된다. 그는 골짜기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깜짝 놀랐다. 산길에서 10여 발짝 떨어진 양지바른 숲속에서 하얗게 바랜 사람의 해골이 서기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 짚이는 게 있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허어, 여기가 틀림없이 명당자리로고. 자고로 범은 사람을 데려가선 그 머리만 명당자리에 갖다 놓는다고 했는데….’하며 중얼거리곤 마을로 내려오다 외딴집엘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집안의 사람들이 제사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사연인즉, 6년 전에 호랑이한테 물려간 집주인의 젯날이란다. 지관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지금은 예전보다 살기가 넉넉하지요?” “그렇지유.” 그 집 장남의 대답이다.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보성이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다. “왜, 할아비 이야기가 믿기지 않느냐?” 그때서야 화들짝 놀란다. “아녜요, 아녜요, 믿어요. 믿는다구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저 함빽산 골짜기를 ‘범골’라구 그러는 거구만요.”
 그날 저녁에 보성인 ‘범골’의 내력을 공책에 정리해 놓고 이튿날 학교 가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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