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시인)

▲ 나기황(시인)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추울 거라 한다. 추위보다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안개정국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정치기상도가 더 걱정이다. 성탄도 점점 가까워오고 정유년 새해도 보름정도 남겨 놓은 시점이지만 탄핵과 특검정국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다.
새해를 가리키는 말 중에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시’의 의미를 다시 새기다 보면 가볍게 지나칠 어휘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보기’, ‘다시듣기’처럼 ‘반복(再)한다’의 개념과, 새롭게 ‘고친(更)다’의 뜻도 있고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생산현장에서 ‘다시’라는 말이 쓰였다면 대개는 불필요한 경비증가나 비효율적인 시스템을 지칭한다. 디자인을 다시하고, 기능을 다시 추가하고, 견적서를 수정하고, 필연적으로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성가신 일일 경우가 많다.
노사 간에 있어서 ‘다시’는 협상결과에 따라 공장 재(再)가동이냐 다시 파업이냐 로 갈리기 도 하고 육상과 같은 기록경기에서 ‘다시’는 경기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정출발’일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다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중성적이고 포괄적인 어휘다.

‘다시’가 희망적이고 감동적일 때는 어려움을 딛고 일어섰을 때이다. 역경 속에서도 본분을 잃지 않고 소신껏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언제나 희망의 언어다. 그 질곡의 역사가 크면 클수록 ‘다시’ 일어섰을 때의 감동은 크다. 지난 12일 박태환 선수가 달성한 제13회 국제수영연맹(FINA) ‘쇼트코스 3관왕’의 위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지만 리우올림픽의 아픔이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88서울올림픽과 2002한일월드컵에서 전 국민이 ‘다시 새롭게’의 힘을 경험했다. 4전5기의 홍수환 선수는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일어섬’의 아이콘으로서 인기강연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IMF시대를 건너 온 이 땅의 아버지들이 들려주는 재기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난 1일 코엑스에서 ‘2016 재도전의 날’행사가 열렸다. 올해가 3회째다. 행사취지는 실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실패의 자산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실패했지만 ‘다시’ 일어선 ‘혁신적 실패사례’를 성공의 로드맵으로 삼자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벨리의 페일콘(Failcon-실패컨퍼런스)이 좋은 예다. 실패로부터 얻은 긍정적 노하우와 다시 일어나는 정신적 유산을 사회적 가치로서 널리 전파하고 본받자는 것이다.

가장 안 좋은 ‘다시’는 ‘이전 상태나 행동을 되풀이해서’라는 부정적 의미의 ‘다시’다.
정부수립 이후 단 한 번도 역대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 국민은  대통령에 대한 악순환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순실증’같은 고질병이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불신에 대한 저항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 관련 청문회와 1988년 전두환 정권의 일해재단 5공 청문회의 모습은 신기할 정도로 닮아있다.
28년 전 찍은 흑백사진이 칼라사진으로 바뀌었을 뿐, 모르쇠로 일관하는 재벌총수들의 청문회모습은 잘못된 ‘다시’의 대물림한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 같다.

문병란 시인은 ‘희망가’에서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고통은 행복의 스승/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고 희망을 얘기한다.
촛불의 메시지는 ‘다시’하자는 얘기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국회도 헌재도 정파적 속셈을 떠나 ‘날선 명검’으로 환부를 도려내고 국민의 뜻을 살펴 달란 외침이다.
“얼음장 밑에서도/고기는 헤엄을 치고/눈보라 속에서도/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
‘희망가’의 첫 연처럼 ‘다시’는 맘먹기에 따라 희망의 언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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