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가끔 가는 작은 산에 마음에 드는 벤치가 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산을 오르면 산마루에 두 개의 나무벤치가 있다. 누가 이렇게 산에 오르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벤치를 놓았는지 산을 갈 때마다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산을 찾았다가 그 벤치에 앉아 쉬었다. 벤치에 앉고 보니, 어쩌면 내 등산의 목표는 늘 그 벤치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치는 휴식의 공간이다. 벤치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진다. 걸을 땐 잘 보이지 않던 나무와 숲이 명징하게 보이고, 신갈나무 갈참나무 상수리 졸참나무 잎새들이 뒤섞여 쿠션을 만든 산길과 잎 떨군 겨울나무들이 빈 가지 사이로 겨울눈을 품고 있는 것도 보인다.
벤치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니 이보다 더 큰 호사가 어디 있으랴 싶다. 이러한 삶이 요즘 트렌드인 휘게(Hygge)의 삶이 아닌가.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속에서 느끼는 편안함 안락함이라는 뜻을 가진 휘게는 행복지수 세계 1위인 덴마크의 단어로 옥스퍼드 사전이 고른 올해의 단어에서 두 번째로 올랐다고 한다.
갑자기 영국에서 보았던 벤치들이 생각난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는 거리나 공원에 쉴만한 벤치들이 많은데, 그 벤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명패들을 달고 있다. 명패에는 그리운 사람을 추억하는 각각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내와 남편, 부모님 등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기리는 짧은 말들이 그 사람의 이름 생몰연대와 함께 씌어져 있어 마음이 짠해진다. 그러니까 그 벤치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고자 시민들이 저마다의 추억을 담아 기부를 해서 만들어진 기부 벤치인 것이다.
벤치에 관한 추억의 이야기라면 게르노트 그릭슈(Gernot Gricksch)의 소설 ‘작은 벤치의 기적’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작은 벤치의 기적’은 알스터 호숫가에 놓인 작은 벤치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1가지 에피소드, 11가지 기적 같은 이야기를 모은 단편집이다.
함부르크 시 공원 관리국장 지그마어 취른 씨는 알스터 호수 공원에 나무로 된 벤치 하나를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는데,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이 벤치를 둘러싸고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일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한다.
알스터 호숫가에서 사진촬영을 하던 톱모델 올레아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쌍의 연인을 보며 자신의 일에 회의를 느끼고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톱모델의 자리를 걷어차 버린다.  벤치에 있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하던 파비안은 16년 전에 사랑했던 여인 비르기트를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의 아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근사한 남자의 은밀한 시선을 즐기다 생각지도 않게 암을 발견하게 된 리자,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개를 산 뒤 혼자보다 ‘함께’가 소중함을 느끼게 된 슈테판, 알스터 호숫가에서 가슴을 드러내 놓고 선탠을 즐기는 여성들을 걱정하는 투고를 매일 보내는 호프만 여사의 가슴아픈 과거, 벤치에 새겨진 하트 모양 안의 이니셜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와 노년의 사랑.
이 책에 나온 주인공들은 모두 벤치를 통해 인생의 반전을 맞는다.
작가는 평범한 우리네 이웃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들려줌으로써 한번쯤 호숫가의 그 벤치에 앉아 보고픈 충동이 일게 만든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독특한 구조와 편안한 서술에 잘 담아낸 작품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작은 벤치’는 어느 곳에나 있음직한 흔한 벤치지만 벤치를 스쳐가면서 생겨난 이야기들은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도 너무나 닮아있다. 그러고 보면 거리를 지나는 저 누군가도 한때는 가슴 뜨거운 청춘의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간절한 사랑과 이별, 고민도 안고 살았을 것이다. 누구나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되는 소중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 이 책을 읽고 나면 기적이란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기적은 각자의 삶 속에서 각기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지만, 그 중에 사람 냄새 나는 기적이 진짜 기적인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 알스터 호숫가의 작은 벤치를 생각하며, 산마루의 벤치에서 햇볕바라기를 해본다. 생각해보면, 매순간 순간들이 기적이 아닌가. 그 기적을 작은 벤치를 통해 확인하며 내가 알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미소로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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