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호 <시인·영동 이수초 교장>

 

산골 학교의 봄은 늦게 온다. 여섯 명의 일학년 신입생들이 입학한지 어언 두 달이 훌쩍 지났다. 그 사이 개울가엔 버들강아지가 물오르고, 아지랑이 이는 골짜기마다 진달래가 흐드러졌다. 아이들이 돌아간 텅 빈 운동장에는 산기슭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가 구성지다.
한 때는 이 학교도 학생 수가 200 여명이 넘는 때가 있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학생 수가 줄어 겨우 5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20년 전, 내가 근무하던 영동 황학초등학교의 모습이다.
오월이었다. 보건소에서 학생 건강검진을 하러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젊은 의사선생님이 오셨다. 같이 온 보건소 여직원이 새로 부임한 공중보건의사라고 소개한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건강검진을 받았다. 나이답지 않게 그는 침착하고 꼼꼼하게 시골 아이들의 건강을 살핀다. 아이들 건강검진이 끝나고, 나도 진찰을 부탁했다. 젊은 의사가 청진기로 이곳저곳 내 몸을 살펴본다.
그런데 느낌이 안 좋다. 그의 손에 들린 청진기가 내 심장 주위를 맴돌며 뭔가 미심쩍은 눈치다. 한참 만에 청진기를 내려놓으며 그가 하는 말, “선생님, 심장소리가 좋지 않네요. 큰 병원에 한번 가보세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린가? 학생들 건강검진 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부탁한 진찰이었다. 그런데 심장소리가 나쁘다니 도대체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간 격년으로 이미 여러 차례 공무원 건강검진을 받지 않았던가? 그때마다 의사는 혈압이 좀 높으니 담배와 술을 줄이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라고 처방하곤 했다. 하지만 담배는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고, 술은 한잔만 마셔도 가슴이 울렁거려 못 마시는 체질이다. 그리고 운동이라면 하루 스물 네 시간이 모자란 형편 아닌가.
혹여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별로 없는 공중보건의사가 오진한 것은 아닐까? 몇날 며칠을 두고 의사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절망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리곤 결국 그의 소견대로 대전의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결과는 놀랍게도 젊은 의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심장 판막이 제대로 닫히지 않네요. 그러다보니 심장이 수축할 때 압력이 약해져 혈관으로 피를 보내기 어려운 상황이지요.”
이런 상태로 오래가면 심장이 비대해지고 탄력을 잃어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또 이런 경우 심장판막수술 외에는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단다. 병원을 나와 시골 학교로 돌아오는 발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더없이 마음이 아팠다. 그 때 내 나이 딱 마흔이었다.
다행히 보건소에 근무하던 분이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을 소개해 주었다. 거기에서 심장판막수술 전문의인 심장외과 장병철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자상하고 친절한 성격의 의사였다. 여러 가지 기초검사를 하고, 자세한 면담을 거쳐 겨울방학에 수술을 하기로 했다.
산골학교에서 공중보건의사에게 검진을 받은 지 꼭 석 달이 지난 뒤였다. 수술을 앞두고 자가 수혈을 위해 세 번 더 병원을 다녀왔다. 실제로 수술을 할 때 수혈을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미리 자기 피를 뽑아 보관해 두는 과정이다.
수술을 하루 앞둔 날, 나와 아내에게 의사가 수술 설명을 한다.
“내일 대동맥 판막수술을 합니다. 심장에 반영구적 인공판막을 이식합니다. 이 때 심장이 정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수술하는 동안엔 인공심장에 의해 피가 순환됩니다.”
그랬다. 수술하는 동안 심장이 멈춘단다. 그 상태에서 인공판막을 이식하고, 혈관을 연결한 다음, 전기충격기로 심장을 다시 작동시킨다는 설명이다. 심장이 몇 시간동안 뛰지 않는다는 설명 하나만으로도 온몸에 쥐가 나며 소름이 돋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회복하기까지에는 상당한 고통과 어려움이 뒤따랐다. 처방받은 약을 시간에 맞게 복용하고, 힘든 일이나 삼가해야할 부분도 많았다. 수술 후 내 몸에는 특이한 변화 한 가지가 생겼다. 이른 새벽, 주위가 조용해지면 심장에서 재깍재깍 시계 바늘 소리가 났다. 심장에 이식된 인공판막이 열리고 닫힐 때 나는 소리였다. 어쩌면 나는 심장 안에 평생을 함께할 영원의 시계 하나를 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일상생활에 큰 불편 없이 살아가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내 나이 이제 육십이 되었다.
인생을 살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면 복 받은 일이다. 산골 학교에서 우연히 만난 이름도 모르는 젊은 의사와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장 교수님, 이 두 분 의사와의 인연은 내 인생에 있어 실로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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