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요즘 정치권은 연정이니 야권 공조니 하여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행동을 같이 하자며 유행처럼 연합을 일삼는다. 연합은 강한 적수를 만나면 함께 힘을 모아 대적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다 허물어진 여당이나 정부 앞에서 움직이는 야 3당 공조는 국민들의 동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하기 쉽지 않은 듯싶다. 이 공조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셈법이 매우 복잡하다 자기 내부로 향한 쏠림뿐인 정치권력의 속성은 어쩔 수 없는 때문일 터이다. 허긴 적과의 동침이 그렇게 쉽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역사에도 무수한 적과의 동침이 있었다. 그 연합들은 성공과 실패를 번복해왔다.
554년 옥천의 관산성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의 태자 부여창은 대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이끌고 신라의 진흥왕과 한판승부를 벌인 것이다. 의리 없이 자신들을 배반한 신라를 그냥 둘 수 없었다며 태자는 신라 병사들을 가을 낙엽처럼 쓸어버렸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친구도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전투였다. 3년전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은 연합하여 고구려의 평양을 공격했었다. 그 결과 신라는 한강 상류를 백제는 한강 하류를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와의 연합은 겨우 1년의 유효기간을 채우지 못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느닷없이 백제를 공격한다. 신라는 기습공격으로 한강하류를 강취한다. 성왕은 울분을 감추고 자신의 딸을 신라로 보내 진흥왕의 비로 삼게 하고 은밀하게 보복을 꿈꾼다. 중국과 교역하기 위한 해상로가 시급하긴 하였으나 신라의 군사정책은 정말 의리 없는 짓이었다. 이에 격분한 백제가 옥천의 관산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신라 또한 서둘러 가야를 흡수해버린 것이다. 백제 성왕이 가야와 일본의 왜를 연합한 것이 불씨가 된 것이다. 성왕은 경호대 50명을 데리고 아들 부여창의 전투를 응원하기 위해 관산성을 방문하려다 보은의 삼년산성에 주둔해 있던 신라의 장군 고우도도(高于都刀)에게 잡히고 말았다.
고우도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요청하였다. 성왕이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거절하자 고우도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했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며 장쾌한 죽음을 선택하였다.
성왕의 목을 신라 왕궁 북청(北廳)의 계단 밑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하고 나머지 몸은 백제로 돌려보냈다. 너무나 비참한 생의 흔적이 되고 말았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9-3번지 부근이 성왕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성왕의 전사로 관산성에서의 양국 대결은 연합을 배반한 신라의 대승리로 끝났다. 백제는 늘 연합으로 이어지는 외교전에 실패한다. 그들이 영산강 유역의 정치세력을 정복하고 싶었을 때는 마한의 20여개 소국의 연합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연합으로 형성된 신미제국은 너무나 당당하여 금관류도 하사받은 것으로 예상된다. 『삼국사기』기록을 보면 498년 탐라국이 조공을 바치지 않자 백제의 동성왕이 토벌군을 이끌고 무진주(지금의 광주)까지 출정한다. 탐라를 포함한 마한 영토를 복속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마한 연합체를 어쩌지 못해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나라의 운명이 지워지고 말았다.
추울수록 손을 잡아야한다. 그리고 잡은 손은 뿌리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행복한 동침으로 끝나는 연합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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