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식 <진천문화원장>

 

병신년 한 해가 저문다. 세월이 참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여러모로 감지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의 속도가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접하게 되니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것도 새해를 희망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짐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문화원장이 되기 전 지난 8년간 도의원으로 열심히 뛰었다. 결코 짧지 않았던 의정활동 기간을 통해 잊을 수 없거나 보람 있었던 기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그 중 아직도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일이 이영남 장군에 관한 일이었다.

진천군 덕산면 기전리 기지 부락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영남 장군의 사당인 충용사와 장군의 묘소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인 양성 이영남 장군은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의 업적에 가리어 그 전공과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임진왜란은 지금부터 424년전 선조 25년(1592년) 일어난 왜군의 침략전쟁으로 이영남 장군은 당시 충무공 휘하의 용맹스러운 장수였다.

그는 충무공의 총애와 신망을 받으며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으로 임진왜란 초기부터 역사에 유례가 없는 수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지막까지도 충무공과 함께 순국해 한평생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중의 충신이다.

이영남 장군은 19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뒤 27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순신 연합 함대의 권관으로 옥포, 합포, 한산대첩 등에서 전공을 세우다 선조 31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전사 했다. 숙종 46년 정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된 장군이었으나 진천의 장군묘역에는 비석과 간판만이 홀연히 서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2007년 3월 20일 258회 도의회 임시회에서 당시 정우택 충북도지사를 상대로 도정질문을 한 끝에 사당건립에 대해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그리고 사당이 건립되었고 이후 이 사당은 2008년 8월 1일 충청북도 기념물 144호로 지정되는 감격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역사에 근거해 잊혀져가던 지역출신 역사적 인물이 비로소 빛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이영남 장군에 관한 언급도, 그를 기리는 사당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도 잘 정비되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충용사 주변에서 제향을 지낼 수 있도록 사당도 지어지고 주차장도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그 후 양성이씨 대종회에서 그간의 노고에 답하는 감사패를 받았고 지난 봄 제향에서도 문중으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등 그 보람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충용사 오른편으로 자리하고 있는 연리지를 보고 있노라면, 서로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 저 말 없는 나무의 모습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양성 이영남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함께 전사하며 풍전등화 위기의 나라를 위해 혼신을 다한 애절함과 푸른 넋이 연리지로 되살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방의회 의원의 역할은 주변과 현장을 많이 다녀보고 주민들의 소리와 주민자치발전을 위해 많은 주민들이 현장에 참여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참여를 훨씬 더 활성화해 실질적인 자치를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진 창의적인 사람이 지방의회에 많이 참여하였으면 한다.

이영남 장군이나 충용사에 관한 생각에 머무르면, 지방의원도 봉사자라는 개념보다는 지역의 다양한 요구를 생활정리로 풀어내고 주민의 뜻을 잘 받들 수 있는 실천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일깨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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