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문학특강 6

▲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 11월 4일 청주시청 대회의실에서 청주시 공무원들 대상으로 ‘생명문화도시 발전방향 모색’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사진·최지현>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 11월 4일 청주시청 대회의실에서 청주시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이날 김 주간은 오랫동안 나라 밖에서 많은 도시들을 봐온 경험을 바탕으로 바람직한 청주시의 도시상 정립을 위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 내용을 요약·보완·정리해 싣는다.<편집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태창입니다. 제가 청주를 떠나 있는 동안 새삼 생각해보니까 어느덧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에 청주의 모습이 크게 바뀌었음을 실감합니다.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하기야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30년이면 3번이나 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을 시간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많은 뜻 있는 분들의 노고가 있었으리라 여겨져서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청주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느낍니다.

청주에 돌아와서 많은 분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특히 제 마음에 감동의 울림을 일으키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주를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선정하고 일본의 니가타, 중국의 칭다오와 함께 엮어서 바야흐로 동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으로 돼가는 21세기의 도시상으로 승화·발전시키려 하고있다는 남다른 시도와 청주를 생명문화도시라는 이미지로 초점화시키기 위한 민관공동의 노력입니다.

저는 83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우연의 일치라든가, 동시발생이라는 현상을 여러 번 경험해 왔습니다만 청주에서 일어난 일과 제가 세계를 다니며 청주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저의 발언 속에 담았던 청주의 모습, 이미지, 설명이 어쩌면 긴밀하게 상의해서 했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신기했습니다.

저는 1989년 12월 31일 청주를 떠나 일본 동경으로 갔습니다. 1990년 1월 1일부터 일본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일을 생각하게 된 동기가 그때까지 청주에서 했던 일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제가 청주시와 함께 청주시의 도시상에 관한 협력을 명시적으로 마음먹고 실행하게 된 것은 1973년 4년간의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부터 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연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이 끝났고 정부와 시민의 관심이 전쟁에서 환경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지구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생명의 위기가 큰 문제로 대두돼 그에 따른 다양한 대응책이 제기됐으며 정계·학계·언론계·종교계·문화계 등의 최대 관심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대학에서도, 특히 진취적인 대학원에서 생태학적 패러다임이 도출되고 거기에 맞는 여러 학문분야가 개발·개설·논의 됐습니다.

저도 저에게 미국 유학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풀브라이트장학재단 미국 본부 측의 권면에 따라서 미국상원에서 개최된 생태학적 인식조정과 환경문제 대응책에 관련된 공청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새롭게 마련된 환경행정학이라든가 환경정치학 또는 환경경제학 등의 강좌에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말하자면 그 당시의 첨단 학문영역을 흡수·소화·체득하고 설레는 꿈을 안고 청주로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온 즉시 충북대에서 환경행정학과 생태정치철학 강좌를 개설해서 우선 학생들과 최신의 학문동향과 지식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지역사회에도 새로운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열어 어느 정도의 공통인식을 형성하고 싶어서 그 당시의-채동환 시장님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과 상의한 결과 100% 공감에 도달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문화원 원장님 ?최병준 원장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과 협의를 마치고 매달 한 번씩 시민강좌를 열어서 새로운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청주시를 통한 행정지도와 문화원을 통한 시민의식화운동을 겸하면서 대학에서의 연구교육활동과 함께 사회봉사의 연대 형성을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때 내세웠던 구호가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 청주’였습니다. 그것은 그전까지 음으로 양으로 정착돼 있었던 교육도시 청주라는 도시상을 크게 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달리 말을 하면 종래의 교육도시 청주를 환경미화도시라는 이미지로 바꾸는 일이었습니다. 왜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라는 도시상을 그리게 됐는가? 거기에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께서 중국고전교육을 통해 깨우쳐 주신 삶의 양이 아닌 질이라는 문제의식에 눈이 뜨는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충남 천안군 동면 장송리(里)에서 서당의 훈장으로 계셨던 조부님과 일본의 도교도(都) 에도가와구 가미시키쵸 895번지에서 목재업을 하셨던 부친 사이를 빈번하게 왕래하며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른 교육과 그것에 저항하는 중국고전교육을 통한 할아버지 나름의 독특한 인간 교육을 동시에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식민지화 교육과 탈식민지화 교육을 동시에 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제가 열두어 살 때쯤이 아닌가 기억됩니다만 어느날 조부님이 느닷없이 ‘里仁爲美(이인위미) 都剛爲利(도강위리)’라는 한문 글귀를 써놓고 그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때의 저에게는 그 뜻을 제대로 읽어낼 만한 한문독해력이 없었습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 저에게 ‘마을(里=장송리=한국)에서는 인(仁)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고 도회지(都=도쿄도=일본)에서는 억센 힘을 자랑하는 것(剛)이 이득(利)이 되는 일’이라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저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그 말씀을 기억해뒀습니다.

그후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 미국유학기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만, 후일 주한미국대사가 돼있던 리차드 워커 박사 -탁월한 중국문제 전문가로 저의 지도 교수의 한분이었습니다-의 중국사상사 강의 시간에 공자의 <논어>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이인(里仁)’에 관한 해석을 두고 견해가 두 쪽으로 갈라졌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한문글귀가 반은 <논어>에서 인용된 것이고 반은 거기에 대한 할아버지 나름의 보충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놀라웠던 것은 ‘인(仁)’을 명사나 형용사가 아닌 동사로 읽었다는 점과 그 문장에 이어서 할아버지 나름의 한·일비교교육문화론을 그 안에 담으셨다는 점을 깨닫고 할아버지의 선견지명에 새삼 감탄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땅에서는 ‘인’=사람됨의 교육문화가 중시되는데 일본에서는 ‘강(姜·强)’=칼잡이=무사의 교육문화가 강조된다는 일본 비판적 한·일 비교 교육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거기서의 격렬한 논의과정을 통해서 ‘인’이란 가령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라든가 ‘어진 마음’과 같은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명사 또는 형용사로 파악하기 보다는 ‘측은히 여기는 행동’ 또는 ‘어진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행위’ 쪽을 더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는 일종의 해석학적 공통이해가 형성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훨씬 나중에 일어난 일입니다만 1989년 일본에 건너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일본 관서지방의 중견기업 경영자들의 중국고전연찬회에 도쿄대 명예교수이면서 중국문제 전문가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던 미조구치 유조(溝口三雄) 교수와 제가 고정강사가 돼 <논어>강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도 <이인편>에 이르렀을 때 바로 ‘이인(里仁)’에 대한 해석을 두고 미조구치 교수와 저 사이에 견해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었습니다.

미조구치 교수는 ‘이(里)’를 오규 소라이(荻生?徠·1666~1728·에도시대 중기의 유학자)의 해석에 따라 ‘거하다(居)’로 풀이하고 ‘개개인의 마음속에 인(=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거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다’라고 ‘里仁爲美(이인위미)’의 뜻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것이 문득 떠올라서 ‘이’를 마을, 촌락, 생활공동체로 파악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각각 ‘인’하는 행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아름다운 마을(고장, 공동체)이 형성된다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업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돼 기업경영에서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인’이라는 마음가짐이 내면화·정착화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이라는 조직 공동체에 일상적인 업무나 손님을 대할 때마다 ‘인’하는 행동·행위·처신이 일상화·습관화·공유화 되면 그 기업이 아름다운 기업이 되고 사원이나 고객이 함께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 기업에 속하게 된 것을 흡족하게 여겨 모든 사원과 고객이 더불어 행복하게 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느끼십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나중에 주최측에서 모아준 감상문을 읽어 보았더니 압도적인 다수의 경영자들이 저의 ‘이인’ 해석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기업인들은 기업이념을 ‘이인’으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仁)’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행위·처신을 말하는가라는 문제를 차분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할아버지의 세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 후에 만난 수많은 중국고전연구자들-한·중·일을 통틀어서-의 ‘인’ 해석은 한결같이 마음가짐의 상태로 파악하고 있었고 거기서 인간됨의 본질·본성·핵심을 규정하는 경향이 현저했습니다. 똑같이 마음가짐의 상태를 ‘인’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으로 파악한다해도 개개인의 마음속 깊숙이 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경우는 서로 다른 해석입니다. 가령 일본의 오규 소라이는 ‘인’의 내재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고 한국의 정다산은 개인과 개인 ‘사이(間)’와 ‘어우름(際)’에서 생기는 일(事)로 규정한다는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음상태가 아니라 일어나는 일(=사건)로 본다는 것입니다.

‘인(仁)한다’는 것에 관한 저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려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저의 ‘인’ 해석이 마음가짐의 상태와는 아주 다르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 어우러지는 가운데 생겨나게 되는 행동·행위·처신의 동태에 초점이 놓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동·행위·처신의 핵심은 중국 고전의 하나인 <서경(書經)> ‘대우모편’에 나오는 ‘호생’(好生= 무엇보다도 생명을 아끼는 행동·행위·처신)이며 거기서 한발 나아가 조선시대의 유학자이자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인’ 해석에서 명시된 바 있는 호생지덕(好生之德=무엇보다도 생명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실천 능력)이야 말로 ‘인(仁)하다’의 참 뜻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문제관심과 사유과정을 통해서 ‘이인’을 무엇보다도 생명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행위가 널리 실천되고 그와 같은 생명존중의 기풍=실천 경향이 실제로 감지될 수 있는 마을·고장·도시가 다름 아닌 ‘이인의 도시’이고 청주야 말로 그 전형이라는 것을 부각·인식·주지시키려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라는 목표상을 그리고 그것을 저의 철학대화의 곳곳에서 언급해 왔던 것입니다. 특히 한·중·일의 철학대화에서는 어느 정도의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가 바탕을 이루고 있어서 ‘이인’을 도시상의 기본으로 삼는데 상당한 공감과 공명과 공유의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철학적 사고의 발전과정의 일단을 말씀드린 것은 저 자신의 청주시 상에 대한 견해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조금이나마 밝혀두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청주시와의 협의와 문화원과의 협력을 통해서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청주시민과 더불어 열어가려고 한 시민각성운동의 출발점은 먼저 청주시민의 생태 미학적 감지능력에 호소하는데 놓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도시 청주’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것이 청주라는 명칭의 한자표기 ‘淸州’ -맑고 깨끗한 고을-에 걸맞은 모습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청’(淸)과 ‘미’(美)를 결부시키고 그것을 ‘쾌’(快)와 ‘행’(幸) 또는 ‘복’(福)으로까지 확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각자가 따로따로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데서 끝나서는 안되고 반드시 함께·더불어·서로서로 지속해 나가는 행동·행위·처신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생태학적 덕성=실천능력의 함양에 힘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나라 밖에서는 청주를 ‘에코시티(Eco-City)’라는 개념으로 주지시키려고 했습니다. 생태학적 건전성이 착실하게 정착한 도시로 형상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인식수준으로 본다면 세계의 최첨단의 도시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한국에서는 국가시책은 물론 일반적인 사회의식이 급속한 산업화·공업화·경제화에 집중됐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소득증대에 과부담 밖에 될 수 없다고 해서 차차 소홀이 여겨지게 됐고 얼마 가지 않아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또 그 후의 민주화의 열기가 대학이나 시민사회에 파급되고 우리나라가 온통 민주화의 질풍노도에 휩싸이는 가운데 환경미화도시 구상은 어느새 소멸됐습니다.

산업도시·공업도시·경제도시로서 청주시의 정책적, 행정적 역량집중 풍조로 말미암아 생태 미학적 생활의 질적 향상과 주민상호간의 행복실감의 균형 공유는 청주시의 발전정책의 핵심요소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됐습니다.

저는 청주에서는 더이상 저의 꿈을 펼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졌고 거기서 탈출해서 새로운 청주상의 재현을 아주 낯선 이향(異鄕)에서 이뤄보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새로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과 새로운 시도를 해보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주로 도쿄대학 법학부와 교토에 있는 국제일본연구센터를 거점으로 일본전국을 다니면서 정말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를 함께 꿈꾸고 그것을 현실화 시키는 방안을 함께 찾아 헤매는 끝없는 여정을 계속해서 밟아나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마음이 흡족하지 않아서 고민하던 중에 세계 미래 연구연합회(World Futures Studied Federation=WFSF로 알려져 있음) 국제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임돼 그 연줄로 약 10년동안에 지구를 세바퀴 반을 돌면서 많고 많은 도시들의 현실과 이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나 ‘살기 좋은 도시’, 그리고 거기서 살면 ‘행복하겠구나 싶은 도시’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아름다운 도시만으로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경치·경관·외관은 얼마동안은 저의 감각을 아주 기쁘게 해줬습니다. 그러나 저의 감각을 기쁘게 해준 경치·경관·외관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흥을 둔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살기 좋다는 것도 우선 편리하고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조건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는 것이 생활감각을 충족시켜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는 동안에 그 편리와 편안과 쾌적이 오히려 따분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변질되는 -어떻게 보면 배부른 불만이라는- 현실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행복이라는 것이 자기 혼자서 행복을 잠시 동안 만끽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도 그렇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게 됐습니다. 그것이 모두 자기 혼자서 생각하고 느끼는 아름다움, 살기 좋음, 행복함에서 끝이기 때문이 아닌가? 저 자신이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 이때까지 저 자신은,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들이, 매사를 자기의 생각과 감각으로만 받아들이고 거기서 제 멋대로 굴리고 돌려서 자기 좋은 대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도 무엇인가가 제대로 되어가지 않게 되면 그 원인은 될 수 있는 데까지 남 탓으로 해왔기 때문에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될 수 있는 데까지 많은 서로 다른 입장과 견해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마음 문을 열어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일본의 중견기업인들과 학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에 힘입어 2000명 이상의 일본 국내·외의 학자·기업인·시민사회의 지도자, 학생, 종교인, 문화인, 예술인 등등 실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다층·다원으로 펼쳐지는 철학대화를 계속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최소한의 공통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생명력의 자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생명=생명력에 대한 자각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데서 나타나는 지성과 감성과 의지는 결국 죽은 지성과 죽은 감성과 죽은 의지로 아무런 힘도, 열도, 빛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사리’(死理)가 아닌 ‘활리’(活理)를 강조했고 포석 조명희 선생이 일제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생명=생명력의 고갈을 그토록 안타까워 했던 것입니다. 데카르트처럼 내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 하는게 아니라 내가(지금) 이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내가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고 그렇다면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살기 좋음에 기뻐하고 행복하다는 것도 모두 살아있다는 실감이 빠져버린 빈껍데기와 같은 것이 아닐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치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중시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오랫동안 먼 길을 헤매고 난 다음에 비로소 생명에 관해서 깊은 성찰을 하게 됐다는 것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지역현상이 아니라 전 지구적인 문제관심으로 새삼스럽게 공유되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라는 것이 개개인의 생명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생명 있는 존재들-과 함께하는 생명유대를 자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사실도 재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라 ‘호생’·‘귀생(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김)’·‘존생(모든 생명을 존중함)’으로 그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됐습니다. 그것도 한사람 한사람의 주관적인 자각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가 함께·더불어·서로 서로 실행하는 상호주관적·공동주관적 ‘호생지덕’이 돼야 한다는 점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청주시가 주동이 돼 우선 동아시아 문화도시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동아시아 문화도시들과 다른 청주시의 자리매김을 생명문화도시로 특징화하려 했다는데 일단 뜻을 모아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서는 안되고 그 뜻매김을 알차게 가꿔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청주시에서 이뤄진 도시상 정립작업은 생명 문화재 또는 생명 문화자원이라는 물체적인 측면에 주안점이 놓여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가령 젓가락 문화라든가 직지 문화 또는 볍씨 등입니다. 그러나 제가 추진해온 청주시의 도시상은 주민의 상호 주관적·공동주체적인 행동·행위·처신의 실천 경향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청주를 생명문화도시로서의 위상을 진작시키기 위한 자원개발과 그 성과의 전시의 행사를 정기적으로 한·중·일을 묶은 형태도 개최하는 것과는 달리 한·중·일의 관심 있는 시민들이 함께 만나서 더불어 대화를 나누고 서로 다른 개성을 발휘하면서 함께·더불어·서로서로·호생·귀생·존생의 기질·기품·기풍이 널리 공유되는 도시로서의 자리매김과 뜻매김에 주력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밝혀둘 필요를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그동안 청주를 동아시아 문화도시로 규정하고 특히 생명문화도시로 특징화시키는데 크게 공헌해온 이어령씨의 생명관이 저하고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가 펴낸 책속에서 ‘생명(生命)’이라는 말의 뜻을 ‘생은 하늘의 명령’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천명’(天命)관과 결부시켜서 생명을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편이냐 하면 중국 사상에 중점을 둔 이해입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중요한 생명이해로 존중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생명’(生命)의 ‘생(生)’은 눈에 보이는 생명현상 또는 개개인의 생명체 속에 깃든 개체생명을 의미하고 ‘명(命)’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개체생명을 그 밑바닥에서 받쳐주고 유치·발전·진화시켜주는 근원적 생명력=우주적 생명에너지를 의미하며 개체생명과 우주적 근원적 생명에너지의 깊은 연관을 스스로의 몸으로 느끼고 알고 깨닫는다는 의미에서의 생명 자각을 뜻하는 것으로 직관체득 해야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생·귀생·존생은 하늘의 명령에 따른다기보다는 스스로 개체생명이 우주적·근원적 생명에너지와 상관연동하는 것임을 자각하고 그것을 깨닫는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실행으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최근에 그러니까 청주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라 밖에서 청주를 생명 또는 생명력에의 자각을 함께 갈고 닦는 철학의 도시, 새로운 생명자각의 철학이 태동하는 도시, 생명자각의 철학이 대화로 살아있는 도시 등으로 때와 곳에 따라 약간씩 다른 표현 방식으로 설명해왔던 것입니다. 결국 생명문화도시 청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저 나름의 도시상 정립활동을 계속해 왔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직한 청주의 도시상은 어느 누구도 독점할 수 없습니다. 청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과제입니다. 저도 그 속에 하나의 관심있는 참여자에 불과합니다. 여기계신 여러분과 제가 힘을 합쳐서 이뤄나가야할 공통과업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빌겠습니다.

▶정리/박장미·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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