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환 <시인·진천문인협회장>

 

라디오를 가지고 싶어서 진천과 청주의 명문 고등학교들을 한 발로 옆차기 하고 서울로 달아난 공학도가 문학의 길을 걷도록 품어준 그 이름 문학평론가 정창범, 평안도에서 오셨고 나뭇가지가 툭 뚝 부러지는 섣달, 새벽의 별빛처럼 푸르게 꽂히며 가슴에 따듯함을 줍니다.

선생님! 오군(吳君)군입니다. 평안하신지요 하늘에서는 이곳을 다 살피시고 소식을 들으시는지요? 어수선합니다. 영화 필름을 거꾸로 돌리겠습니다.

전깃불이 없던 진천의 광혜원 산골, 삐삐통에서 울려나오는 연속극 ‘삼현육각’ 이창환·고은정 성우의 목소리에 울고 웃던 마을.

고향 탈출 작전! 사촌형님 유리가게 구석에 거처를 잡고 용산공고 전자과에 안착, 콜롬보 교육 프로그램 원조에 대한 보답으로 월드컵 예선 동대문 운동장, 오스트레일리아의 국기를 흔들며 빵과 우유를 맛나게 먹고 본색을 드러냈던 응원이며, 돈 뜯긴 설움에 운동부를 몰고 가서 ‘백범광장’을 앞마당 삼아 어깨들과 어울렸던 엉뚱한 세월도 있었습니다.

통일벼 풍년의 행운으로 대학으로 직진! 전자공학과 3학년이며 문학이 좋아 평생의 취미로 삼겠다며, 까뮈의 ‘시지푸스 신화’, ‘거부하는 몸짓’ 그 미학의 실천, 행동주의 문학, 구조주의 등에 대해 지적 호기심에 찬 횡설수설을 다 들으시고 “젊음이 참 좋다. 책보다 좋은 스승이 있을까? 명작을 읽어야지…” 웃으셨고 마침내 20여년 서재를 열어 주셨습니다.

문학개론, 소설론, 시론 등 여러 강의를 편안하게 듣도록 기회도 주셨지요. 희극과 비극을 연기하듯 열정적이며 깊은 우물과도 같은 강의, 거꾸로 감명 깊게 읽은 소설이나 연극 등에 대해 소감과 그 까닭을 물으시니 공부를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데모 행렬에서 복학생 오군을 불러내 버드나무 그늘에서 마음을 잡아주셨습니다. 군부에 이용당할 수 있다. 정신 차려라! 그 말씀을 받아 장시 ‘나룻터의 봄’을 창작 4.19 판, 대학신문에 실었지요.

교생 실습 중 5.17이 나고 여름 내 학교가 문을 닫았던 7월, 광혜원까지 시외버스, 또 걸어서 제자의 집에 오셨습니다. 담배 조리, 고추건조 풀베기 농촌의 여러 모습을 눈에 넣으셨고, 주례를 맡아달라는 선친의 부탁을 웃음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예술인 마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앞집에 사셨고 제가 건너마을 사당동에 신혼을 차리고 신림동 미림중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니 아이들 돌이며 가족 돌보듯 챙겨주셨습니다. 구로동 성당에서 운영하는 야학에 강의를 하고 동인지 ‘우리 함께 사는 사람들’ 2집에 ’홍선웅 작가의 민중 판화를 싣고 ‘민중교육지’ 관련 홍선웅 작가의 파면 여파로, 집도 학교도 은평구로 옮기니 섭섭함과 걱정이 크셨지요

1990년대 중반 두번째 시집 ‘서울로 간 나무꾼’ 의 서문을 주실 때 선생님은 과천으로 이사를 하셨고 병석에 자주 계셨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물질면에서 윤택해 보이지 않는데도 후회하지 않고 신들린 사람마냥 올해도 시집 한 묶음을 든 채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묘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시 속에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담는 가운데 대상을 맵게 풍자하려는 시도를 진지하게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실험을 멈추지 말라. 그의 또 다른 성숙을 기대하고 싶다” 짧게 그러나 그 몇말씀이 금과옥조였습니다.

곧 정년을 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을 때 가슴에 산 하나가 무너진 듯, 그러나 가볍게 문상하고 잊고 살았습니다. 2010년 건국문학회장 책임을 맡고 선생님의 사랑이 몸살처럼 제게 다가왔습니다. 여름날의 아름다운 남한강 스토리텔링, 신경림 ‘목계 장터’ 시비 순례 등 1박 2일 모임을 마치고 안성 삼죽 천주교 공원 묘소에 꽃과 소주를 올렸습니다. 그 사진을 카페에 올리고 6년, 엊그제 자제(훈)의 댓글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빛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선생님! 오군이 ‘문학나무꾼’이라 칭하며 옛집을 수리하여 골방을 치우고 책을 펼쳤습니다. 현대문학 평론상 선생님의 책- 목월 평전 ‘달빛 나그네’가 산골 마을의 착한 독자를 기다립니다. “무딘 칼은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그렇습니다. 폭설을 기다리며 외쳤습니다. ‘ 다시 칼을 갈아 작품을 쓰자’ 선생님! 온기를 내려주십시오. 그곳은 더욱 춥겠지요. 늘 강녕 하십시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