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청암 송건호 선생의 생가터에 표지석이 섰다. 옥천군과 청암 송건호기념사업회는 지난해 12월 21일 송 선생의 고향 옥천 군북면 비야리 생가에 ‘참 언론인 송건호 선생 생가터’라 쓰여진 표지석을 세웠다. 표지석은 옥천산 화강암으로 길이 90㎝, 높이 45㎝의 크기의 반원 형태로 만들었고 글씨는 김성장 시인이 썼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요즘 세태에 참 언론이 절실함의 암묵하는 의미 있는 문학행사라 평가될 것이다.
이에 앞서 옥천문화원과 정지용기념사업회는 2005년에 정지용 선생 모교인 일본 동지사 대학에  지용 선생의 시비를 세웠었다. 당시 시비를 가로 1.8m, 세로 1.2m 크기의 옥천산 화강암으로 이 역시 반원 형태로 제작하였으며 이 시비에는 교토 시내를 관통하는 압천(鴨川·가모가와)를 노래한 시를 담았다.
이로써 옥천은 조선 근대문학의 한 정점을 형성하면서 현대문학의 길을 연 정지용 시인과 한국 참 언론의 사표라는 평가를 받는 송건호 언론인을 명실상부하게 지역의 문학적 자산으로 등재하게 이르렀으니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것이다.
1970년대 박정희는 체육관에서 선거를 치루고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그리고 종신 대통령의 터전을 마련한다. 그 당시 송건호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있던 동아일보는 어느 신문보다 비판적이었다. 1975년 동아일보의 정론직필을 못마땅하게 여긴 중앙정보부는 동아일보를 길들이기 위해 기업인들에게 동아일보에 광고를 넣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동아일보는 광고란이 비어 있는 신문을 발간할 수밖에 없었다. 신문의 광고를 재개하기 위해 사주측이 문제 기자들의 대량 해직시킨다. 그도 함께 사직하였다. 이를 지켜본 시민들은 그냥 있지 않았다. 언론에 메스를 대고 있는 정부에 대항하여 돼지 저금통을 깨기 시작하였다. 그 돈으로 미니광고를 넣었다. 돼지저금통은 한국의 언론을 지켜내는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때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청암 송건호 선생이었다. 청암의 자유언론에 대한 소신과 사회의 기대지평에 대한 신념은 흔들림 없이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요즘 정치평론가들처럼 어느 당을 편드는가 싶으면 다음 선거에 그 당 국회의원이 되는 위인들과는 하늘의 높이만큼 거리를 달리하는 분이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기관지인 월간 말을 발행하였다. 월간 말은 80년대 왜곡 없는 날카로운 보도로 언로를 세웠다. 이 시기에 이른바 언론보도지침을 폭로하기에 이른다. 송건호 선생은 항상 언론의 정론관을 지켜왔다. 그러면 한족으로 기울어진 날개짓에 힘을 얹어 균형을 잡아주려 하였다.
서울대 법대에 다니던 1953년 대한통신사 외신기자로 출발하여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기자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1974년(당시 49세)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는데,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2년형을 받은 것도 이것이 빌미가 되었다할 것이다.
청암의 증조부께서 충남 대덕 동면에서 충북 옥천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함으로써 그는 옥천 증약이 출생지가 된다. 1927년 9월 27일 부 송채찬과 모친 박재호 사이에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나 증약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경성의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다가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해직기자들을 모아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결성하고 월간《말》을 발행하여 언론 통제 하에서 언론의 민주화를 위해 험로를 나섰다. 언론의 길을 모색하고자 국민주로 자금을 모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고 그는 사장과 회장으로 활동하던 중 파킨슨병이 발병하여 2001년 사망했다. 그는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의 위패는 고향인 충북 옥천 군북면 감노리에 있는 보륜사에 있다. 1994년에는 호암상을, 1999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하였다.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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