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대 동국대 교수 목간학회 발표회서 ‘695년설’ 주장

▲ 통일신라시대 지금의 청주 부근인 서원경의 촌락 경제 상황을 기록한 문화재인 '신라촌락문서'. 가로 58㎝, 세로 30㎝ 크기의 두 장짜리 문서에는 4개 촌락의 명칭, 구역, 인구, 노비의 수, 말과 소의 수, 토지의 종류와 면적, 과실나무의 수 등이 자세하게 정리된 귀중한 유물이다. <윤선태 교수 제공>

(동양일보 박장미 기자) 청주 부근인 서원경(西原京)의 촌락 경제 상황을 기록한 문화재 ‘신라촌락문서’가 통일신라 초기인 695년 것이라는 주장이 다시한번 제기됐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지난 4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목간학회 정기발표회에서 신라촌락문서에 있는 ‘아내 처(妻)’ 자의 서체를 근거로 695년설을 주장했다.

그는 앞서 1995년 발표한 논문에서 신라촌락문서에 ‘1월’(壹月)이라는 글자가 있는 점을 바탕으로 755년설과 815년설을 부정하고 695년설을 새롭게 제시했다. 7∼8세기에는 1월을 ‘정월’(正月)로 표기했는데, 695~700년에만 정월을 11월로 옮겨 ‘1월’(壹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는 것이 논거였다.

윤 교수는 이날 발표회에서도 ‘처’자가 ‘'일 사(事)’ 자 아래에 ‘여자 녀(女)’가 붙어 있는 형태인 점에 주목했다. 이 글자는 일본 역사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가 1959년 논문 ‘신라의 촌락’에서 형태가 이상하다고 의문을 제기한 글자이기도 하다.

윤 교수는 6세기 신라 비석인 울주 천전리 서석(525년, 545년)과 단양 적성비(550년 추정)에는 ‘아내 처’ 자가 신라촌락문서와 같은 모양이지만, 8~9세기 비석인 감산사 미륵조상기(719년)와 감산사 아미타조상기(720년), 흥덕왕릉 비편(872년 추정)에서 발견되는 ‘아내 처’ 자의 서체는 오늘날과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신라촌락문서는 가로 58㎝, 세로 30㎝ 크기의 두 장짜리 문서로 4개 촌락의 명칭, 구역, 인구, 노비의 수, 말과 소의 수, 토지의 종류와 면적, 과실나무의 수 등이 자세하게 정리된 귀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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