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자 <소설가>

 

시인 두보는 시 ‘곡강’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표현을 했다. 건전하거나 희망적인 말은 아니지만 우리도 나이 칠십을 고희라 하고 있다.

곡강은 당시 장안지역의 연못인데 내란으로 혼란스러운 때에 두보는 그 지방으로 내려가서 술과 시 읊는 낙으로 지내면서 읊은 시 중 한편이다. 쉽게 말하자면 ‘인생 칠십까지 살기 어려운데 술이나 마시자’ 라는 의미다.

나는 고희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는다. 칠순이지만 내 가슴은 꿈을 안고 살며 소녀처럼 설레고 그리움은 더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날의 짜릿한 전율을 생각하면 설렘이 안개처럼 나를 감싼다. 잊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날의 설렘과 온몸으로 스며든 희열이 그립다.

1966년과 1967년의 사이는 결코 찰나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직도 내 가슴으로 이어져서 흐르고 있으니까.

한 번도 말썽을 만든 적이 없고 성적 또한 우수했던 고3 소녀가 친구로부터 송년파티 초청을 받았다. 꿈같은 말에 이미 나는 풍선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대학 2학년 오빠가 친구들을 불렀단다. 난생 처음 이성을 만나는데 가슴이 뛸 수밖에.

1966년 12월 31일 D-day다. 놋젓가락을 연탄불에 달궈서 머리카락 타는 냄새 감수하면서 앞머리에 웨이브 넣고 올케언니 코트 빌려 입었다. 내님은 누구일까, 어디에 계실까…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가 하면 발씨는 나비날갯짓이다.

먼저 온 오빠들 넷이서 이미 다과 준비를 해놓았고 친구들은 아예 화장까지 했다. 고개도 못 들고 인사를 나누었다. 파티라는 단어에 영화처럼 기대 했으나 살짝 기대와는 어긋나지만 대학생 오빠들이 모든 기대를 다 채우고 남았다. 밤 11시 쯤 되자 12시 까지 말처럼 뛰고 딱 12시 부터는 양의 해니까 양처럼 온순하게 밤을 새자고 했다.

커다란 전축에 레코드판을 얹자 처음에는 흑인가수 낫킹콜의 투영이 흐르자 모두들 따라 부르다보니 합창이 되었고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다음 곡부터는 알아듣지도 못하지만 신나는 곡에 맞춰서 온몸을 흔들었다.

처음 추는 춤이지만 신나게 두 손은 허공을 찔렀다. 12시 사이렌이 울리자 전축을 끄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고 누가 짝을 지어 준 것도 아닌데 주섬주섬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가 두 사람씩 짝이 되었다. 통금도 없는 날, 아! 눈이 발목까지 쌓였다. 우린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곧바로 운동화 속 양말도 다 젖는다.

그 오빠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가죽장갑을 벗어서 나를 준다. “괜찮아예” “여자피부는 더 약합니더” 계속 내밀고 있으니 얼먹은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다가 결국엔 지켜보는 앞에서 내 손에 낄 수밖에 없었다. 오른손을 넣는 순간 그의 체온이 내 손을 꼭 쥐었다. 갑자기 불앞에 있는 것처럼 온 몸이 달아오르며, 심장 뛰는 것이 다 보일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남세스럽게도 한겨울 눈밭을 쓸어온 바람이 봄바람 같았고 내가 마시는 공기조차 달곰삼삼했다. 계산동에서 시작해 명덕 로터리를 돌아 다시 계산 성당 옆 우리 집 앞에서 해어질 때까지 눈길을 걸었다 기 보다는 기구를 타고 날아다닌 기분이었다. 장갑을 벗어주고 돌아서면서 얼굴을 감싼 내 두 손의 따뜻함이 나의 체온이 아니라 그의 체온으로 느껴졌다.

그 오빠도 지금쯤 내 체온이 밴 장갑을 끼고 나처럼 전율을 느껴 주기 바라면서 꿈꾸듯 대문을 열었다. 바로 그 때, 계산 성당의 새벽종 소리가 뛰는 가슴에 구멍을 뽁 뚫어서 싸아한 설렘이 새어 나왔다. 깊은 산속 바위틈에 쫄쫄 흐르는 약수처럼 40 여 년을 마르지 않고 흐르는 설렘이기에 비밀스런 추억이 되었다.

그립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날 밤, 얼마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는지, 온 몸이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쩔쩔 매던 단발머리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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