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범 <시조 시인>

 

벌써 55년 전의 일, 임관하여 최초로 부임한 곳이 서부전선의 한 GP(비무장지대 내의 675m 고지의 경계초소)였다. 물론 시설은 전부 지하화 되었고 비무장지대라고 했지만 실제로 기관총도 소지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철조망을 이중으로 설치하고 밖을 향해 밤이면 불을 밝혔다. GP는 전부 돌을 쌓아 올려서 외부에서 보면 하나의 성(城)이었다. 이 곳의 나는 필연 소성주(小城主)였을 것이다.

물론 자가발전으로 불을 밝혔다. 나는 초병들의 근무를 확인하기 위해 참호를 돌다보면 155마일이 거의 다 눈으로 잡히는 듯 싶었다. 횡과 좌우로 고지마다 밝힌 불빛이 장관이었다. 운무(雲霧)속에 뜬 고지의 불빛은 아름다웠고, 외로운 섬이었다. 자신이 젊었기 때문에 느끼는 자부심이기도 했다.

남북한의 막힌 운해(雲海)의 바다에 뜬 불빛은 고쳐보면 ‘고해(苦海)의 바다에 뜬 연꽃’이기도 했다. 이 불모지에 눈이 내리면 내 마음의 마른 잔대 꽃엔 보라색 눈꽃이 엉겨 붙는 듯 싶었다. 파카를 두 벌 껴입히고 보초시간을 단축하여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했다. 1, 2, 3초소를 한 바퀴 돌면 초소의 장(長)이 있는 지휘소로 와 근무시의 동정을 보고했다. 물론 이 같은 대기의 시간엔 깔창을 따끈따끈하게 굽도록 했다.

보내온 많은 문학전집은 나의 문학생활에 활력소가 되었고 문단추천을 받은 것도, 시가 활자화 된 시기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요즘엔 신인상제도가 있어 단번에 문단 등단이 가능하지만, 당시엔 1회 추천 뒤 1년, 2회 추천 뒤 또 1년, 추천완료 까지는 최소 3년이 걸렸다. 그만큼 고생을 시켰다. 1회 추천작품 ‘함박꽃’이 ‘11시에 만납시다’라는 대담 프로(1987년 KBS 1TV 50여분, 김동건 아나운서와의 대담)에 이 시가 비무장지대와 함께 방영되기도 했다. 여기서 함박꽃은 비무장지대 순찰 중 무너진 초가와 돌담 사이의 잿더미를 비집고 나온 커다란 함박꽃으로 여기 살던 소녀의 기도가 꽃으로 핀 것이라고 여겼었다.

2회는 ‘임진강’, 추천완료작품은 ‘비(碑)’(1963년). 1964년도엔 ‘신인예술상’ 수석상에 ‘빙하사(氷河史)’로 수상했고, 1965년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일식권(日蝕圈)’이 당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곳 초소의 근무자에겐 그러기에 특식이 주어진다. 그야말로 고기는 물론, 생선 야채 등도 보급되어 먹을거리가 충분했고 일부 생선은 말려 요리사(?) 별미의 찜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해 뜨면 물 길러 계곡에 내려갈 땐 내복도 삶아 세탁을 하는 여유도 지녔었다. 이 때도 1명은 반드시 무장을 한 채 경계를 서는 것은 물론이었다. 날씨가 따뜻하고 달빛이 환하거나 잎이 우거진 여름밤이다. 이렇듯 아름답게만 보였던 불모지의 야경 속에 초병이 당기는 비상종(초소마다 비상시 줄을 당기면 초소장이 있는 관측소의 종이 덩그렁 소리를 내는 연락망)이 울렸다. 대기병을 내보내 동정을 살폈다. 초소 하단에서 돌팔매를 해온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중대 상황실로 보고를 했고 중대장의 연락을 받았다. 경계를 강화하고 “까불면 죽는 줄 알라며 큰 소리를 내 보내고 움직임이 포착되면 사격이나 수류탄을 투척해도 좋다며 침착하게 대처하라”는 당부였다. 물론 상황은 바로 종료 되었다. 지금 하산하지 않으면 수색중대의 매복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바삐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인민군은 한나절이 되면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싶게 비무장지대 내의 남과 북의 경계선인 저 아래 계곡의 순찰로를 따라 1개 분대 병력이 천연덕스럽게 행군을 하는 것이었다.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으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일시에 똑같이 말이다. 그러면 GP의 소대원들은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며 아침은 뭘 먹었나? 하고 소리를 지르고, 그들은 이밥에 고기 국 먹었다! 라고 답한다. 그 말이 나올 것을 예상했는데… 역시나였다. 한번은 비무장지대 표지작업을 하며 그들에게 화랑담배도 나눠 주고 이야기도 살짝 나누는 말미도 지녔는데 이 풍경은 관측소에서 볼 수 있었고 직접 체험한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였다.

이제 또 천고(千古)의 눈이 내리는 계절, 하늘은 눈보라 소리를 내며 군무(群舞)를 돌릴게다. 굵은 눈보라는 휴전선의 진혼곡이자 수심가다. 아니 휴전선의 힘이자 꽃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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