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기원전 49년 1월 14일 루비콘(Rubicon)강의 북안(北岸)에 선 시이저(Caesar)는 자신의 결정을 마음으로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갈리아 원정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라인(Rhine)강까지 넓힌 그는 자신의 영웅적 행위가 로마의 실직적 지배자인 폼페이(Pompey)와 원로원을 두렵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이미 갈리아 총독이 너무 많은 권력을 소유했으며 그로 인해 로마의 공화정이 위험에 처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 편에서는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미 갚을 수 없는 개인적인 부채가 시이저의 갈리아 정복에 대한 욕망의 ‘직접적 원인이다’라는 인정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의 군사적 역량과 정치적 야망에 대한 공화파들의 걱정을 완화시킬 수는 없었다.
  논리적 사고를 위한 기본법칙의 성립은 플라톤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치면서 안정을 찾은 3대 논리는 중세의 스콜라철학에 의해 그 완성을 보았다.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 그리고 배중률(排中律)이라는 세 가지 기초 항진명제(恒眞命題-tautology)가 이것들이다. 항상 ‘참’이어서 ‘거짓’일 수가 없는 이 명제들 중 첫 번째인 동일률은 하나의 사실에는 하나의 판단만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두 번째인 모순율은 동일 판단에 모순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이로 인해 어떤 사실이 ‘참’이면 ‘참’일 뿐 동시에 ‘거짓’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의 배중률은 논리적 판단은 어떤 명제가 ‘참’이냐 아니면 ‘거짓’이냐의 둘 중 하나이며 그 중간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이다.
  로마의 원로원은 임기연장을 거부함으로서 자연스레 시이저로부터 갈리아총독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는 원로원의 소환명령에 따라 로마로 귀환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그와 한 몸이 되어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일부에 해당하는 갈리아지역에서 맹위를 떨친 제 13군단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당시의 로마법에 따라 시이저의 지휘권은 자신이 총독으로 있는 갈리아지역 이외에서는 박탈되어야 했다. 군대지휘권이 없는 자의 지휘행위는 사형에 처해지는 범죄였으며 이는 그 지휘에 따른 병사들에게도 적용되는 준엄한 법률이었다. 루비콘강은 갈리아와 로마의 경계였으므로 이를 벗어나는 순간 시이저는 무장을 해제하고 군대의 지휘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민간인 자격으로 로마로 가서 공화국을 위협한 죄로 소추당한 자신의 입장을 법적으로 변호해야 했다.
  배중률이란 사고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논리의 중간지대가 없어야 한다는 명제이다. 어떤 사람의 범죄에 관한 법적 평가에 있어서 그의 행위는 유죄 또는 무죄 둘 중의 하나의 판단에 해당되어야 한다. 범죄사실을 확정할 수 없는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무죄의 사유가 될 뿐이다. 확실하지 않다는 개념은 종교적 또는 도의적 개념에서 관념의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수학적, 과학적, 철학적, 법적 논리로 편입되어서는 안 된다.
  13군단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루비콘강을 건넌 후에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시이저의 지휘에 따르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죽음 아니면 승리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내전(內戰)에 돌입하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좁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로마로의 행군에 전력을 다한 병사들이 첫 날 밤을 맞이했을 때 시이저는 지휘관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현 교육현실은 이제 개혁이 늦추어진 만큼의 후진성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운명의 투호(投壺)게임이 되고 있다. 오늘 우리 사회는 고득점과 높은 성적 그리고 좋은 대학이라는 단 하나의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일차원 화살위에 전국의 모든 아이들을 서열화 시켜 놓았다. 마치 투호게임을 즐기는 듯 어린 영혼들의 고통을 음미하는 어른들의 강요 속에 되돌아 갈 방향을 알지 못하는 화살이 되어 우리의 아들, 딸 들이 자기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철학적 고뇌라는 단어는 들어 볼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물리적 삶만이 넘실대는 항아리 안으로 던져지고 있다. 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순간적 자기위안에 방치함으로서 사회에 처절하게 반항하고 있어도 이들을 돌보는 환경은 인격과 물질을 증가함수관계로 보려는 시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
  역사가 남긴 위대한 정신적 가치들을 계승 발전할 기회를 멀리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무장한 요즘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들처럼 물질적 자극으로 아이들의 감각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한 그 결과를 어떻게 역사가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가슴에 있어야할 것이다. 숫자로 환산될 때만 존재가치를 가지는 것들로 가득 찬 우리 사회에서 게임중독과 삶의 가치에 대한 추상적 고민의 실종같은 무서운 형태로 반항하며 우리 청소년들은 지금 몸부림치고 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지금 개혁을 통해 우리를 영혼을 가진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 우리는 진짜 영혼을 잃어버리고야 말겠다." 우리가 오늘 이 외침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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