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선 (시인)

▲ 노창선 (시인)

며칠 전 한 지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모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 시 '애인'을 읽고 시와 심사평을 같이 보내왔다.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다 / 서로의 이해는 아귀가 맞지 않았으므로 나는 왼손으로 문을 열고 너는 오른손으로 문을 닫는다 ……… 더는 넘길 게 없는 달력을 바라보며 너는 평화, / 말하고 나는 자유, 말한다 / 우리의 입에는 답이 없다 우리는 안과 밖/ 벽을 넘어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딘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시를 읽는다는 일이 생경하게 느껴지리만큼 수상한 시절에 이러한 문자의 수신은 내 뒤통수를 치는 사건이었다. 그 분은 공학계열의 교수님인데 시를 다 읽었다니, 그리고 나름 감동을 받고 나에게 문자를 보내주었다니, 나는 새해 벽두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몇 마디의 짧은 문장들을 덧붙여 주었다. ‘비전문가로서 저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옵니다. 예술이 본인의 내면세계를 그대로 표현하니 일반인들에게 전달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면이 많은데 저 같은 비전문 대중에게도 많은 긍정적 메시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을 듣고 나는 시 전문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았다. 시대성을 잘 드러내주는 알레고리가 이 시의 핵심으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의미를 해독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공학자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시에 눈길이 갔고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적어 보내주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반가웠다. 어느 해보다도 쓸쓸한 연말연시에 많은 사람들이 시라도 읽으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국민들의 마음은 참 곤궁하기만 하다. 대통령의 탄핵이 걸려 있는 우리 국민들의 나날은 충격과 고통의 일상이다. 그러니 시를 읽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하면서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것이다. 촛불 시위가 문화 축제로 발전되는 이유이다. 피 흘리지 않고 시스템의 변화를 기도하는 무혈 혁명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견디고 너는 너를 견디’며 서로 애인이 될 수 있는 힘, 그것이 민주주의의 동력이 아닐까. 이 시는 ‘애인은 여당을 찍고 왔고 나는 야당을 찍었’으나 너와 내가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삶을 아름다운 화음으로 조율해 나가려는 노력이 가상한 메시지를 준다.
  조윤선 문체부장관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모른다고 했다.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고 했다. 어찌 된 일인가. 청문회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조위가 끝나고 시차를 두고 떠오른 것이 ‘건전콘텐츠TF팀’의 실체였다. 문체부에서는 블랙리스트를 건전콘텐츠라고 지칭하였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건전콘텐츠를 지원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술가들을 배제 혹은 억압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법적으로는 블랙리스트가 아니라는 것이니 국민들을 우롱하는 참 영리한 법 논리의 교묘함에 혀를 찰 노릇인 것이다. 지원배제 명단을 작성하고 문화예술인들의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의도였음이 명백해졌다.
  대통령과 대기업 대표들, 최순실과 정유라를 매개로 한 공익재단의 사유화, 해외로의 돈세탁 혐의 등등 이 시대의 역사적 실상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너무도 허탈하기만 하다. 타락하고 부패한 애인이여, 그만 견디고 그만 버티고 이제 그 마음 내려놓기를 바란다. 최순실은 처음 검찰에 출두할 때 국민들에게 ‘죽을죄를 지었다’고 했고 ‘그 후 종신형을 각오하고 있다’라고 했단다. 그러면서도 혐의는 전면 부인하고 있다니 대단한 견디기 버티기의 전형적 모습이다. 특검의 시일이 촉박하다고 한다. 법적으로 밝혀야 할 사건들이 새롭게 부상하는 현실을 그냥 덮고 갈 수는 없는 것도 또 하나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은 야당을 찍고 또 한 사람은 여당을 찍었으나 애인들은 서로 등을 기대고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그 해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혹은 새해의 첫 달력을 열면서 평화를 말하고 자유를 말한다. 그렇게 아름답게 공존하는 삶이 그립다. 이 모든 일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를 기원해 본다. 새해에 다시 눈부시게 솟구치는 해를 바라보면서 힘찬 희망으로 새 달력을 벽에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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