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宮崎) 현
-백제마을: 미카토 신사(神門神社)와 정가왕(禎嘉王) 무덤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당한 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 다수가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본에 들어 온 후에도 토착세력, 또는 유이민 세력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을 위한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 백제 왕실 출신으로 다수의 유이민을 이끌고 일본에 들어왔던 백제의 정가왕은 싸움에서 패한 후 가신들을 데리고 2척의 배로 키타큐슈지방인 치쿠시(筑柴)로 피난 가려 했으나 풍랑으로 인해 방향을 잃고 표류, 반대편 방향인 휴가(日向) 근처의 해변에 도착했다. 다른 한 척의 배는 더 남쪽으로 표류해 가구치우라(蛟口浦)해변에 도착했다.
해변에 표착한 정가왕과 그 일행들은 추격군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안개가 많이 끼고 방어하기 좋은 미카토(神門)라는 곳에 정착했고, 또 가구라우치 해변에 표착한 정가왕의 장남 복지왕(福智王)은 히키(比木)에 안주했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던 시간도 잠시, 미카토에 살고 있던 정가왕의 행적이 발견됨에 따라 토벌군이 미카토를 향해 진격해 왔다.
기조(木城) 에 머물고 있던 복지왕은 이 소식을 듣고 이시카와우치(石河內), 도가와(渡川), 나가노마타(中之叉), 기지노(鬼神野) 등의 호족 세력을 규합하고 부왕을 돕기 위해 미카토로 갔으며 정가왕도 주변의 호족들을 규합, 현재의 도고쪼(東鄕町)와 접경지대인 이사하라(伊佐賀)에서 혈전을 벌였다. 하지만 결국 패해 정가왕과 복지왕 모두 숨지고 말았다.
이상의 이야기는 역사서에는 전하지 않는 전설이지만 미카토 신사와 정가왕의 무덤인 츠루가 무덤, 그리고 복지왕이 정가왕을 찾아뵙는 모습을 재현한 전통 축제인 시와스마츠리(師走祭り:지금도 음력 1월 3째 주 금~일요일(3일간)에 걸쳐 축제를 하고 있음. 인근 부락까지 모여서 이 축제를 매년 실시. 1년간의 악귀를 모두 태워 달을 끄슬리는 우리나라 정월대보름 행사와 비슷함. 한겨울 냇가의 찬물에 목욕하고 제사하는 것도 우리 풍습과 동일함.) 등이 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한 전설만은 아닌 역사의 실재를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백제마을이 있는 난고무라(南鄕村)는 백제의 옛 수도인 부여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왕래하고 있으며 부소산성의 백화정이 재현된 ‘연인의 언덕’에는 한·일 친선의 종이 걸려있고 부여의 객사 건물을 본떠 만든 ‘백제관(百濟館·김종필씨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백제문화 전시관)’ 그리고 남향관이 있다.
미카토 신사는 정가왕을 주신으로 모신 신사이다. 전투에 패해 죽고 말았지만, 그를 존경하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정가왕은 다이묘진(大明神)으로 추존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지만 미야자키현에서는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 신사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구리방울(銅鐸)과 구리거울(銅鏡) 등은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 전하는 유물과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써 신사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서정창원(西正倉院)이라는 것을 만들어 당시의 보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츠카노하라(塚の原)고분은 정가왕의 무덤이다. 정가왕이 이사하라 전투에서 전사하자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 마을 입구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는 무덤의 형태가 남아있지 않고 나무와 숲만 무성하다. 전설에 의하면 정가왕이 전사하자 따르던 12명의 시녀도 자살해 함께 정가왕 무덤 주위에 묻혔다고 한다.
시와츠마츠리는 미카토 신사와 히키 신사 두 곳에서 동시에 시작되는 마츠리로 9박 10일 동안 진행된다.(음력 12월23일 부터) 복지왕이 부왕 정가왕을 배알하기 위해 가는 과정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써 정가왕 전설이 단순한 전설이 아닌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히키 신사의 주신인 복지왕이 부왕을 배알하기 위해 90km를 걸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하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미카토 신사에서 부왕을 배알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