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해묵은 책을 꺼내들었다. 얄팍한 지식인 흉내로 젊은 날의 사회적 관계를 에둘렀던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그 세월만큼 빛바랜 현실과 먼지의 무게로 남아있다. 허나 칼 포퍼의 섬뜩한 예지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할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회는 열린사회뿐이다. 인간사회의 제도와 관습은 늘 변화를 전제한다. 기득권은 공고하지만 언제든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주장과 행동을 한껏 수용할 수 있는 사회가 열리사회라는 논리다. ‘열린사회’는 비판을 수용하는 사회이며, 고용의 기회가 열려있는 사회이다. 더불어 일할 권리와 존엄성을 추구하는 사회이다. 고용대란이 목전에 있는 지금, 닫힌 기득권의 빗장을 풀어야 한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들은 전체주의였다.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허상의 그늘에 주목했다.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고,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열린사회 적은 누구인가? 모르쇠사회이다. 불의는 참고 불이익은 참지 못하는 사회이다. 열린사회는 흙수저가 계급이 아닌 사회이다. 더 많은 일할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의 사회이다.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깨어있는 다수에 의해 자생적 질서를 구축하는 사회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소외된 청년들을 끌어안고 가지 못하는 정의는 바른 정의가 아니다. 철지난 칼 포퍼의 진언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의미를 갖는 것은 어른들의 방기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청년고용 절벽의 시대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깨어있고 사유하는 유토피아적 온전한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청년고용에 대한 사회적 해법, 그 도상의 혼란 속에 우리의 청년실업은 선언적일 수밖에 없다. ‘먹고사니즘’에 천착한 청년들의 혼란이 우리사회의 민낯이며 청년이 일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일하고 있는 사회 각 구성원들의 도덕적 양보와 자기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타들어가는 고용가뭄 해갈의 단초가 있다. 그것이 노동시간 단축이며 일자리 나누기이다.

건강한 보수가 아닌 병든 보수와 공동체적 좌파(左派)가 아닌 개인주의적 자파(自派)가 득세하고 참담한 나라의 정치수준이 국민수준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닫힌사회이다. 우리 사회의 청년고용실현과 지속가능한 고용은 사회 구성원들이 책임성과 나눔의 원칙을 지키며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공동의 과제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닫힌 사회를 미개사회로 보고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열린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고용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우리안의 카르텔은 합리적인가? 손익계산적이고 배타적인 고용에서 동질적이고 우호적인 고용으로  일자리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정규직인 내 몸에 두터운 웃옷을 두르고서야 어찌 일하지 못하는 청년들의 시린 겨울을 느낄 수 있겠는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공동체는 멀고 가족은 가깝다. 일상의 불의에 애써 눈감는 태도. 노동조합활동을 노동운동이라고 애써 자위하는 태도, 정치를 욕하지만 정작 선거 때만 되면 지연학연에 자유롭지 못하는 이들은 작은 것에 분노하지 않기 위해 눈을 부릅뜨며 큰 것에 분노한다. 내 자식만 아니면 된다는 근시안적 착각이 청년고용정책의 연착륙을 저해하고 지리멸렬함의 원인이다. 닫힌사회의 자화상이다. 스스로 신념에 찬 리버테리언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한없이 파시스트가 된다. 청년고용에 있어 쾌도난마는 없다. 설사 그렇다면 반동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시나브로, 쌓아둔 사내유보금을 청년고용에 투자하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청년고용을 단체협약의 조건으로 내거는 노동운동의 본령회복, 부모의 마음으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대학의 정체성 회복이 전개되어야 한다. 그것이 열린사회로 가는 마중물이다.   

고종석은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에서 “사람이 옳고 그름의 논리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고사는 것만큼 엄숙한 일은 달리 없다”고 말한다. 숙연해진다. 오늘 우리를 좌우의 이념으로 포획한 것들은 거대담론으로 채색한 채 참으로 으리으리해졌지만, 우리의 내면은 서슴없이 표독스러운 야만으로 흘러넘친다. 이 야만은 대개 청년에 대한 희망이 없으며 반성도 없다. 졸업을 앞둔 지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취업재수에 나선 청춘들을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어른인 나도 열린사회 야만의 적들이다. 내 일자리를 움켜주고 정부 탓만 하면서 부디 청년들에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레토릭은 삼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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