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소설가>

 

‘조정시’라는 친구가 있었다. 10살 동갑인데도 정시는 나보다 훨씬 의젓했다. 말수가 적은 생원 타입으로 친구라곤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나를 대할 땐 늘 미소를 짓고 가슴에서 우러나는 정다운 표정을 보여 왔다. 네모 반듯반듯하게 인쇄해 놓은 것 같이 글씨를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려서 나는 늘 정시를 부러워하고 그 부러움이 존경의 대상으로까지 번진 것인지 어느덧 그 앞에선 순한 양이 돼버렸다. 상급생인 4학년짜리도 두들겨 패서 ‘개고기’라는 별명을 달고 있을 만큼 억센 놈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성격이 서로 달라야 오히려 조화를 잘 이룬다는 말이 맞는 것인지 우리는 서로 아끼며 잘 어울리었다. 아마 서로가 자신에게는 없는 것, 자신은 못하는 것들을 발견하곤 그것에 대한 부러움이 존경으로까지 발전했을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정시가 그림을 그릴 때는 옆에 꼭 지켜있으면서 크레용도 집어주고 지우개로 대신 지워주기도 하면서 그 조화 속에 홀딱 반해 어린 마음에도 그에게로 향한 우러름으로 가슴을 채웠고 정시도 내가 축구, 말 타기 등 격렬한 운동이나 놀이를 할 때는 꼭 지켜보면서 나의 분투와 선전에 박수를 수없이 보내고 끝나고 나면 나에게 달려와 옷을 털어주고 땀을 씻어주면서 ‘히야!, 히야!’를 연발하는 거였다.

그런데 그 정시 네가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매우 서운한 마음이었을 텐데 운 기억은 없고 오히려 웃은 기억만 남아 있다. 그때 정시는 나에게 하얀 종이로 포장을 단정하게 한 담뱃갑만 한 선물을 내밀었다. 그 어른스런 미소를 빙긋이 지으며 그것을 내밀었을 때 어린 가슴이 약간 야릇하게 일렁이기는 했지만 역시 아무 말 없이 나는 계면쩍은 표정을 하면서 받았다. 그리곤 불쑥 참 멋대가리 없이, “내 선물도 받아” 하면서 등을 둘러대고 정시를 불끈 업었다. 그리고는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숨이 차도록 부지런히 또 부지런히 왕복했다. 업은 사람도 업힌 사람도 한껏 즐겁기만 했다. 나는 정시의 그 성냥갑만 한 선물을 이튿날까지 만지작만지작 대다가 마침내 풀어보았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그건 텅 빈 갑이었다. 아, 우리는 얼마나 가난했던가!

정시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6.25전쟁이 나고 한 3주일쯤 될까 할 때였다. 정시가 홀연히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리곤 하나 하나 서글픈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일곱 식구 생계가 막연하여 큰누나가 인민군 부상병으로 가득 찬 의전병원(현 국군통합병원)에 다니며 밥 짓는 일을 하고 있어 누룽지를 가지러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는 정시를 가운데 두고 눈들만 꿈쩍이며 목안으로 침만 삼킬 뿐이었다. 어머니가 그 귀한 꽁보리밥을 갖다 주니 정시는 찬물에 말아 허겁지겁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곤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3년간의 피란생활 후, 난 정시를 따라 한번 가 보았던 신촌역 앞 정시네를 찾아가보았으나 없었다. 그런 후로도 신촌역 부근엘 갈 일이 있을 땐 그 집 앞을 가보기도 하지만 완전히 변해버린 탓에 서성거리다 올 뿐이다.

정시가 이사할 때 내게 준 선물은 빈 갑이 아니었다. 내게 향한 정성이, 나와의 생활이 차곡차곡 담겨있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근 67년여를 꺼내 쓰고 있어도 고갈되지 않고 이처럼 계속 우러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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