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덕 <청주시도서관평생학습본부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다.

몇 해 전 1월의 끝자락, 나는 일본의 니가타현으로 여행을 떠났다.

도착해서 제일 하고 싶었던 일은 소설 속 주인공 시마무라가 탔던 그 열차를 타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해나 어느 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을 기억한다.

군마현 미나카미역에서 출발해 니가타 현 유자와역에 도착하기 전 통과하는 시미즈 터널을 지나자 정말이지 소설 속에 그려진 풍경 그대로, 밤의 밑바닥이 하얀, 환상 같은 눈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래서 난 그 해, 그 어느 날이 아닌, 길고 긴 시미즈 터널을 통과하던 그 순간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자마자 칠흑처럼 까만 밤을 살포시 이고 있는 새하얀 눈 세상과 마주하던 그 아름다운 순간을…….

우리를 태운 기차도 소설 속 그 신호소에 똑같이 멈췄고, 직접 눈을 보기 위해 유리창 문을 열었다. 찬바람에 실려 온 눈송이가 거침없이 나부끼는 모습이 너무나도 몽환적이었다.

그때 나는 한참 일에 지쳐 있었고, 반복되는 일상이 피곤했으며, 누구에게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잔뜩 화가 나있었다. 그래서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복잡한 세상과 단절된 조용한 산 속으로 떠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다음으로 내가 찾아간 곳은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와 여자 주인공 요코의 인간적인 관계의 배경이 되었던 유자와 온천마을의 그 유명한 다카한 료칸(여관)이다. 제일 처음 료칸에 도착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소설 속에서 묘사된 요코 같은 매력적인 게이샤가 료칸 어디에선가 툭~ 튀어나와 나를 맞이할 것만 같았다.

실제로 다카한 료칸 2층에는 아직도 ‘가스미노마’(안개의 방)이라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그 옛날 머물렀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동안 지쳐 있던 나의 심신에도 치유의 온기가 작은 방울소리처럼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키타는 유난히 쌀이 맛있고 알차다. 그래서 쌀과 물이 좋은 아키타는 술 맛도 뛰어나다. 저온 장기숙성 방식의 주조가 특징인 아키타에는 약 40여 곳의 주조장이 있다. 그 만큼 사케의 종류도 다양하다. 술이 다양하니 그에 따른 안주도 발달해 음식도 정말 맛있다. 그래서 낮이면 이 곳 저 곳 맛 집을 순례하며 다양한 사케에 취해 삶의 시름을 잊었다.

밤이면 소복소복 조용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노천 온천에서 취기에 오른 노곤한 몸을 달랬다. 근심이 달라붙을 틈이 없었다. 바로 그 곳이 천국이었다. 겨울이 매서울수록 이듬해 봄은 화사하다.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으니, 돌고 돌아,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눈이 끝내는 시나브로 녹아서 내에 이를 것이다.

늘 쫓기듯 달려온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 비로소 가장 소중한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지혜를 얻었다. 그해 나는 설국에서 봄의 기운을 맞을 수 있었다. 이렇듯 내 안의 깊은 번민을 다독여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었다.

그러니 삶의 고단함과 불협화음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듯 아플 때에는 혼자서 깊은 산 속으로 떠나는 주인공 남자처럼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속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목적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도약이다. 그 동안의 나를 이해하고 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한 치유의 도약!

끊임없이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잠깐의 ‘멈춤’은 ‘뒤쳐짐’이나 ‘밀려남’으로 받아들인다. 잠깐 멈추면 도태되는 줄 알고 있지만 정작 큰 문제는 멈출 줄 모르고 내 달릴 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의 삶에 보다 나은 선택과 도약을 위해서는 반드시 멈춰야 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그 멈춤의 시간 동안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과 끝없이 반복되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혼자 하는 여행은 가장 좋은 멈춤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 그러니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온 당신! 이제는 잠깐 멈춰도 괜찮다. <매주 월·수·금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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