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들의 관심과 응원, 선수의 사기 높이고 좋은 성적 이끌어”

 

(동양일보 조석준 기자) 전국의 체육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기고장의 명예를 걸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겨루는 전국체육대회가 충북에서 개최된다. 역대 세 번째, 13년 만에 충북에서 치러질 98회 전국체육대회는 오는 10월 20~26일 7일 동안 주경기장이 있는 충주를 중심으로 청주, 제천, 보은, 옥천, 영동, 증평, 진천, 괴산, 음성, 단양 등 충북도내 11개 시·군 69개 경기장에서 47개 종목 3만명에 이르는 선수와 임원들을 맞게 된다.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충북체육계의 대부이자 산증인인 최동식 충북체육회 고문으로부터 전국소년체전 7연패에 대한 뒷얘기와 전국체전 성공개최를 위한 노하우를 들어본다. 구순을 바라보는 최 고문은 87세라는 고령에도 아랑곳없이 꼿꼿한 자세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2시간여 인터뷰에 응했다.

 

소년체전 ‘7연패’ 신화 일군 충북체육의 살아있는 전설

만년 꼴찌 충북을 전국 최강으로… 최연소 체육회 사무처장으로도 유명

 

 

-건강해 보이는데 비결은요.

“제가 원래 체조선수 출신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허리디스크로 고생하곤 있지만 스트레칭으로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여든일곱 치고는 대체적으로 건강한 편이지요.”

 

-그동안 충북체육계에서 많은 일들을 해오셨죠.

“38년간 충북체육회에 몸담아 오면서 크고 작은 일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지금의 충북체육이 있을 수 있던 것은 학교마다 지역특성을 살린 종목을 지정해 엘리트체육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체육회 직원들과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을 밤낮없이 뛰어다녔고 선수영입을 할 땐 거지취급까지 받는 등 온갖 설움을 받아야만 했지요.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참고 버텨냈습니다. 우리에겐 전국 우승이라는 꿈이 있었으니까요. 충북체육회를 은퇴한지도 벌써 12년 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눈과 귀는 항상 충북선수들이 있는 경기장을 향해 있습니다.”

 

-충북체육계에 몸담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193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네 살 되던 무렵 할아버지의 고향인 청주로 오게 됐고 평소 운동에 소질이 있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기계체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평행봉을 직접 만들어 사용해야 하는 등 제대로 된 운동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척박한 환경이었기에 더욱 악착같이 운동을 했던 것 같아요. 열심히 노력한 끝에 1949년 드디어 전국체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가 처음이자 마지막 이었습니다. 이듬해인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후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한 뒤 충남 장항농고와 충주고에서 2년간 교사로 근무하다 아버지께서 운영하던 건설회사에 입사했고 민주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충북체육회에 몸담게 됐죠.”

 

-당시 만 39세 전국 최연소 체육회 사무처장을 맡았는데요.

“초창기 충북체육회는 전국체전 신청서조차 접수하지 못할 정도로 유명무실했습니다. 1971년 고 육영수여사의 친오빠였던 고 육인수 공화당 충북도당위원장(5선 국회의원)이 제가 서울대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다는 이유만으로 태종학 도지사에게 사무처장에 임명하도록 부탁해 얼떨결에 맡게 됐습니다. 당시 충북은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꼴찌를 면키 어려웠고 체육회에는 기본적인 자료조차 없었습니다. 때문에 선수들은 대회가 끝나면 수치심에 모자에 달린 ‘충북’마크를 떼기 일쑤였지요. 그때 느꼈습니다. ‘더 이상 지는 체육이 아닌 이기는 체육’을 하고 싶다고.”

 

-‘이기는 체육’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지요.

“지금도 어느 지역 학교이름만 대면 어떤 종목을 잘하는 학교인지 대번 알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도내 각 학교의 특성에 맞는 경기종목을 지정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각 학교의 유능한 체육교사를 선별, 체육회 사무처 직원으로 파견시켜 장학사와 함께 타 시·도에 파견해 각 종목별 우수선수들에 대한 실질적인 정보수집에 나섰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자료와 선진 시·도의 벤치마킹을 한 뒤 ‘충북체육비전 5개년계획’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충북선수단의 체질개선이 이뤄졌습니다. ‘땀방울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진리처럼 충북선수단의 기량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전무후무한 소년체전 충북 7연패에 대한 감회가 새롭겠네요.

“만년 최하위 팀 충북의 ‘반란’이 시작된 건 1973년 전국소년체전에서 였습니다. 당시 첫 우승의 감격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비견될 만큼 대단했죠. 정말 눈물이 나더군요. 가는 곳 마다 소년체전 우승에 대한 기쁨과 환호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도민들 모두가 하나로 뭉치게 됐고 ‘하면된다’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그 열기는 한 동안 식을 줄 몰랐고 대회만 나갔다 하면 우승했기에 타 시·도에선 ‘제발 충북만 피해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종전에 천대받던 충북선수단의 모자는 지금의 프로야구팀의 모자처럼 늘 쓰고 다닐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때 우승의 참맛을 알게 된 충북대표팀 선수들이 성장해 전국체전과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에 출전해 최고의 성적을 거뒀습니다. 특히 88올림픽에서 충북출신 선수들이 딴 메달 수만 헤아려도 세계 24위에 해당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저는 젊은 혈기에 열정 넘치던 심부름꾼에 불과했고 전국소년체전 7연패의 숨은 주인공들은 따로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고 육인수 국회의원과 고 태종학 도지사, 육진성 교육감이 바로 그 숨은 주역들입니다. 충북 체육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지원을 해주셨지요. 이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충북체육의 위상은 아마도 없었을 겁니다.”

 

-꼴찌팀 충북을 정상에 올려놨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1973년 충북이 전국소년체전에서 첫 우승한 이후 고 박정희 대통령과 고 육인수 의원이 청와대에서 대담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육 의원이 ‘꼴찌팀이었던 충북선수단이 피나는 노력 끝에 우승을 했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충북이 어쩌다 한 번 운이 좋아 우승한 것 가지고 그렇게 좋아하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육 의원이 ‘그럼 다음 대회에서도 우승하면 체육관을 선물로 달라’고 했답니다. 충북은 보란 듯이 이듬해인 1974년 소년체전에서 우승했고 시골 체육회사무국장인 제가 청와대에 초청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떨리는 마음에 대통령께 인사를 하자 덜컥 1억 원이 든 하얀 봉투를 건네주셨습니다. 당시 청주시 사직동 체육관부지의 땅 값이 1평에 600~1000원 정도 했으니까 1억 원은 굉장히 큰 돈 이었습니다. 눈물이 글썽일 정도로 뭉클한 순간 이었습니다. 그때 받은 대통령 하사금과 도민들이 모은 성금 2억7000만원을 더해 지금의 청주실내체육관이 탄생한 겁니다. 박 대통령께선 ‘충북체육관’이라는 친필휘호도 써주셨지요. 그러나 1996년 시의원들이 ‘청주의 명칭과 맞지 않는다’며 체육관 이름을 ‘청주실내체육관’으로 개칭하면서 원본 휘호를 도난당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도청 과장출신으로 충북체육회 차장이었던 유영석씨가 쓰레기소각장에 버려져 있던 원본 휘호를 발견, 보관해오다 신문기자들의 도움으로 현재 충북체육회관에 보관돼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그 휘호를 볼 때면 그때의 감동이 밀려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올 전국체전 충북순위를 예상한다면요.

“승부의 세계가 냉정하고 경기 당일 컨디션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만큼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시설과 최고의 기량,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갖춘 만큼 충북선수단이 종합 3위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봅니다. 또 남은 기간 더욱 열심히 땀 흘리고 노력한다면 2위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국체육대회 성공개최를 위한 한 말씀을 해주시죠.

“무엇보다도 충북도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지난 소년체전 7연패와 월드컵 4강신화가 증명하듯 인간은 사기에 따라 능력이 4배까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조직위와 관계기관, 도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13년 만에 충북에서 치르는 전국체전을 성공 체전으로 이끌어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충북체육회에 바람이 있다면요.

“충북체육회가 행정적으론 잘하고 있겠지만, 충북도에서 사무처장을 비롯해 이사들 대부분을 체육인이 아닌 분들로 구성하다보니 체육계 선·후배간의 연결고리가 끊겼고 일반 행정단체로 변질된 것 같아 걱정입니다. 무엇보다 체육인들은 선·후배를 챙기는 문화가 강해 끈끈한 결속력으로 큰 힘을 발휘하곤 합니다. 앞으로 체육회가 선·후배 체육인들이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동식(崔東植) 고문은...

△1931년 9월 17일 일본 오사카 출생 △1951년 청주농고 졸업 △1955년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 졸업 △1957년 충남장항농고 교사 △1958년 충주고 교사 △1960년 중앙토건이사겸 부사장 △1962년 민주공화당충북도당 청년분과위원장 △1964년 민주공화중앙위원회 상임위원 △1968년 충북체육회 이사 △1971~1975년 충북체육회 사무국장 △1978년 민주공화당 제1지구장 사무국장 △1980년 청주신협 이사 △1989~1995년 충북체육회이사 △1995년 충북체육회 사업단장 △1995~2005년 충북체육회 상임부회장 △1995년 대한체육회 이사(상벌심사위원) △2006년~ 충북체육회 고문 <상훈>△문교부장관상 △도지사표창 △충북도문화상(체육부문) △대한체육회 표창 △대통령 표창 △청주시 청원구 공항로(사천동)159-12 정도드림빌아파트 201호(☏043-900-2075)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