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선 (교통대 교수 / 시인)

▲ 노창선 (교통대 교수 / 시인)

이맘때쯤이면 나도 ‘여우난골’에 가고 싶다.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이 머릿속에서 자꾸 맴돈다. 나이 든 사람일수록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 피붙이에 기대어 살던 때를 그리워한다. 설날이면 일가친척들이 모이고 어둑어둑해져 석유 등잔불이 마당 높이 걸리던 그 날은 꿈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이제는 아파트에 살면서 인터넷 쇼핑으로 차례음식을 주문하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현대인들에게 인터넷 마켓은 진리인 것 같다. ‘27일 당일 배송’이라는 배너를 붙여놓고 지역별로 내용물에 따라 다른 가격이 매겨져 있다. 여행지에 가서 차례를 지내기도 한단다. 아니면 아예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서 명절연휴 인천공항은 연중 최고로 북적이는 날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현재의 세시풍속이다.
  어렸을 적 함박눈이 내리던 날은 밥알을 고여 놓고 그 위에 큰 대소쿠리를 반쯤 세워 엎어 놓으면 참새가 째잭거리며 내려와 앉았다가 덜컥 갇혀버리곤 했다. 그 때가 설날 즈음이었던 같다. 한 번은 조용하던 시골 동네에 난리가 쳐들어 왔다. 군대에 간 삼촌이 미군들과 트럭을 몰고 나타나 탕탕 총을 쏘며 꿩 사냥을 해왔던 것이다. 온 동네 사람이 몰려들어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들을 구경하느라 대단했다. 아주 오래전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잡아온 꿩으로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 고모들은 꿩국을 끓이느라 샘으로 부엌으로 분주하게 동당거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대체로 겨울은 그렇게 소란스럽거나 고요하거나 했다.
  요즈음에 와서 명절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모처럼만에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즐겁게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직장일도 내려놓고 고요하게 부모님과 마주 앉아 삶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기회가 되어 좋은 것이다. 세상 시끄러운 소문도 잠재우고 귀엽고 예쁘기만 한 어린 것들의 재롱잔치에도 푹 빠져 볼 일이다. 며느리들이 힘들어 하면 설 전날은 대가족이 총 출동하여 외식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차례 상은 미리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 놓고 말이다.
  무얼 먹으러 갈까? 늘 밖에서 먹고 들어오는 아들의 의견보다는 평소 아이들과 집에서 씨름을 하던 며느리에게 ‘네가 먹고 싶은 것으로 정해 봐라’ 하면서 말이다. 설빔으로 장만한 예쁜 옷을 시댁에 오자마자 벗어놓고 부엌에 들어가서 전이야 만두야 지지고 볶다보면 여성들에게 명절은 고난의 시간이다. 그 예쁜 옷을 벗지 말고 식당을 예약하고 화장을 고치는 거다. 어머니들이 행복해야 명절(名節)이 명절(明節)이 될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막걸리보다는 맥주를 좋아하고 와인에 손을 뻗는다. 그 애들이 ‘여우난골족’을 이해하기나 하는 걸까? 달나라 별나라 얘기 같을 것이다. 그러나 달나라 별나라에 가신 우리 조상님들의 옛날이야기를 꿈결처럼 들려주고 가르쳐주고 인간의 정리(情理)를 밥상에 올릴 일이다. 그것이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화제보다 더 높은 일이 되리라 생각한다.
  저녁에는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하고 아이들에게 목청을 돋워 시(詩)라도 한 줄 읽어줄 일이다.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아이들 앉혀놓고 이제는 달나라 별나라에 가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도 해주자. 할머니가 어렸을 적 이가 아파서 잠을 못 자고 보챌 때 그 밤에 할머니의 할아버지가 등에 업고 어정어정 달빛 아래서 달래주시던 날, 은백양나무 잎은 솔솔 바람에 어찌 그리도 하얗게 나풀대던지. 그런 이야기들을 꺼내 놓으며 조상님들의 사랑에 조금씩 눈물 흘리면서 밤을 지낼 일이다.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는 그 여우난골에 나도 돌아가고 싶다. 흰 눈 위의 여우 발자국을 따라가 잊혀 지지 않는 그 시간 속으로 다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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