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 김규원(충북학연구소장)

분노와 탄식 그리고 증오와 폭력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최소한 이 땅에서만이라도 언젠가는 봄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라는 어린아이 수준의 희망을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로 본다면 헛된 희망일 뿐이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은 “최고의 시절이었고, 또한 최악의 시절이었다. 지혜의 시기였고, 또한 어리석음의 시기였다. 믿음의 시대였고, 또한 불신의 시대였다. 빛의 계절이었고, 또한 어둠의 계절이기도 했다. 희망의 봄이었고, 또한 절망의 겨울이기도 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또한 그 반대쪽으로 가고 있기도 했다”로 시작한다. 요즘의 이 땅과 저 나라의 상황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니랴. 광장과 밀실의 대립은 물론 광장 안에서도 합의나 동의를 얻지 못하는 평행선적 행위들이 이른바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혹은 매국이라는 비난 속에 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가는데 이 광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또 하나의 덕목은 무엇일까. 애초에 밀실에 대해서 무관심과 무지했던 것에 대한 자성이야 기본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 인간의 혹은 공동체 구성의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시각예술의 영역에서 인간의 조건이라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 있다. 작가는 푸른 바다를 그렸는데 그 바다는 캔버스에 담긴 그림으로 실제와 幻影, 내부와 외부의 경계의 모호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비슷하거나 거의 같은 제목의 문학과 회화작품들이 담고 있고 지시하는 내용은 다르지만 예술적 의미는 비교적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앙드레 말로나 고미카와 준페이의 동명의 소설들이  전쟁 등과 같이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자율적이고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속의 개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도 결국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경계의 모호함 속으로 유인되어 이도저도 아닌, (그러나 결코 정량적인 반반의 선택이 아닌) 애매하고도 모호한 상태로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걷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는 꼼짝 않고 있는데 안개가 움직이는 것인지 등) 구분과 나눔이 곤란한 지경이 결국 집단이나 조직, 사회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개인의 제약된 현실의 또 다른 상황이 아닌가싶다. 모든 것이 명확하고 분명하다면야 선과 악은 물론 시비를 가리기도 쉽지만 불행히도 우리네 삶은 그렇지가 않음이 나이를 먹고 몸의 기능이 낡아 갈 때 아는 사실인 듯하다. 늙거나 기능이 낡으면 보이는 것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그 보이는 것이 사람이 되는 조건들의 일부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기름 장어처럼 피해가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들이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른바 사회적 자본이라는 신뢰, 공존, 공생과 연민 등등에 대한 관심이나 지향도 없이 오로지 나와 가족만을 생각한다면 아울러 조금 더 범위를 확장을 해서 세계 시민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사안조차도 지역이기주의 등에 갇혀버린다면 우리는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그야말로 애매한 지경의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의미의 발견과 확산 그리고 공유(도깨비의 주인공이 아닌)를 통해서 살아가는 모습이 문화이며 가치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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