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철학수필가 민병산 선생, 재야의 활명철학 창시”

▲ 생전의 민병산 선생
▲ (왼쪽부터)박영수 수필가, 김용환 충북대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임찬순 희곡작가, 유성종 동양포럼 운영위원장은 지난달 13일 동양일보 회의실에서 ‘그리운 청주인 1 -민병산’을 주제로 좌담을 가졌다.

■ 김용환 충북대 교수

독서·사색·관조 통한 담소 즐겨

사람은 누구나 철학한다고 생각

겨울 편지 ‘으능나무와의 대화’

우주생명의 경건함 사색

 

■ 박영수 수필가

드문 독서가이자 철학 에세이스트

이론서에 철학 수필종류로 안다뤄

수필모은 ‘민병산 수필집’ 만들어

선생을 철학수필가로 인정해줘야

 

■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민병산 선생은 철학을 즐긴 사람

본인철학, 사철학서 공공철학되길 염원

어린 꿈나무들 바른 꿈 키우기 노력

장래세대 도움되는 선인들 전기 출판

 

■ 임찬순 희곡작가

청주 민씨 최고 명문가 출신인데도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 살아

많은 글을 썼는데도 책 내지않아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저는 한 권 책과의 만남이라는 인연이 그 다음의 인생을 크게 방향 지운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번에 청주에 와서 아름다운 인생철학의 수필적 형상화를 이루신 분으로 평가받는 박영수 선생의 ‘개똥모자에 핀 구름꽃’이라는 수필집을 읽던 중 그 안의 구절들이 다 저에게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만 그 중 특히 민병산 선생에 대해 쓰신 부분에서 저는 새삼 그리움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유성종 운영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새해에는 ‘그리운 청주인’이라는 표제 밑에 다섯 분을 선정해 그 분들을 기리는 모임을 가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렸고 유 위원장께서도 동의해주셔서 맨 먼저 민병산 선생-선배라고 부르는 편이 더 친근감이 느껴져서 앞으로는 선배라는 호칭을 쓰겠습니다-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민병산 선배를 잠시 뵌 적 있습니다. 민가네 여러 형제 중 청주고 동창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형이라고 소개해 준 분이 민 선배였습니다. 그 후 충북대 교수로 있을 때 최병준 선생의 소개로, 그리고 오세탁 교수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는 신동문 선배와 함께였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그 선배가 얼마나 큰 그릇인지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 마음 속에 형체를 갖추지 못한 영상으로만 어렴풋이 남아 있었는데 박영수 선생의 글을 읽고 나서 불현듯 그리운 마음이 솟아났습니다. 오늘은 오전 중 민 선배가 남기신 책을 중심으로 얘기하고 오후에는 그 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순서로 진행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럼 민 선배에 관해서 열심히 공부하신 김용환 교수께서 ‘철학의 즐거움’을 중심으로 발제해 주시겠습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문필가이며 서예가인 민병산(閔丙山·1928~1988) 선생은 한 갑자 60년을 세상에 살다가 가신 철학자입니다. 고요하고 내면적인 성품으로 독서와 사색과 관조를 통해 사람들과 담소하기를 즐긴 바둑 애호가입니다. 간혹 내뱉는 소박한 말이 해학적이어서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비록 규격화된 서예기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가슴에서 우러나온 민병산체를 만들었기에 정겨운 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이 획일화되는 물질문명의 비정함을 염려하며 인간다움의 따뜻함을 담아 낭만수필로 남긴 유고집이 ‘철학의 즐거움’입니다. 선생이 타계한 후에 그의 수필을 묶어 1990년, 신구문화사에서 한 권으로 펴낸 이 책은 6부작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1부, ‘철학의 즐거움’에서는 사람은 누구나 철학을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기쁨 가운데서 철학이 가장 고상한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철학은 만인의 것이며 모든 사람이 철학자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깃든 ‘무엇을 탐구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누구나 철학할 수 있으며 마음의 가난으로 꾸준히 탐구하려는 노력이 뒷받침 되면 누구나 ‘철학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주생명 시대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밑바닥에 있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소크라테스를 통해 감동을 받은 것은 그가 인간의 위치를 ‘무지’와 ‘지’의 중간에 두고서 ‘지’를 향한 철학적 충동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2부, ‘한국과 한국인’에서는 4000년의 과거세 은자(隱者)로서 모습을 탈피해 이제는 세계사적인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민족의 의지는 흙과 피에서 솟아나는 것이며, 젊은 세대의 사고와 행동이 움트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개체생명에 대한 자각이 소중한 시대이기에 낭만적 비굴 같은 참는 미덕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백성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토끼 형태의 반도에서 복된 나라를 이룩하리라는 희망을 품었으며 아담한 풍토에 어울리는 도덕적 성격과 섬세한 미적 감수성을 지녔다고 평가합니다. 3부, ‘인생과 역사’에서는 ‘하느님은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벌써 돌아가셨다는 말이 있는 데 자세한 소식은 모른다고 합니다. 최후의 심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세례를 받지 않아도 시민이 될 수 있으며, 참회를 하지 않아도 죽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에게 자유가 있음을 찬미합니다. 신은 이미 돌아가시고 인간 또한 나아갈 방향을 모르는 상황에서 고독자의 사색을 찬미합니다. 판문점에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을 바라보면서 우리 민족에게 통일보다 더 진실하고 더 절박한 척도는 없을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4부, ‘사랑과 행복’에서는 애정이 없는 결혼은 비극이라고 말하며, 감정의 형태는 장치를 반영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의 감각이 육체에서 비롯하지만 유행을 통해 매력이 물질화되는 것도 함께 주목합니다.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융합에서 오는 행복장치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결혼은 오히려 비극이 된다고 합니다. 여성의 덕과 위안마저 없다면, 인생은 현실보다 훨씬 거칠어지고 인생을 중도에 포기한 남성도 많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가난은 도덕적 훈련을 습득하지 못해 나타난 당연한 벌이지만, 사회질서를 존중하고 공동목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경제적 독립과 안정도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5부, ‘바둑과 붓글씨’에서 선생은 바둑은 예술이면서 과학이라고 말합니다. 바둑의 예술적 재미는 절대적 무효성과 일회성의 연동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바둑이 과학인 것은 운명과 심술의 함수를 수리적으로 풀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바둑은 유희를 수반하면서 한 판 승부로 결말나기에 운명적입니다. 바둑의 재미는 정념의 연소에서 옵니다. 온갖 정념이 연소한 이후는 평온이 찾아듭니다. 기인(奇人) 천상병에 동의한 바둑에 관한 명언은 ‘바둑이 끽연(喫煙)’이라는 것입니다. 취미 삼아 붓글씨를 쓰면서도 선생은 천부의 소질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결국 자신이 소질이 없다는 자각에서 철학의 역설을 깨닫게 됩니다. 6부, ‘살아가는 이야기’에서는 액세서리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다양하게 펼칩니다. 넥타이는 남성의 앞가슴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의 자세나 마음의 태도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단순하면서 선명한 효과 뿐만 아니라 분장기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선생은 고향 청주에 부치는 겨울 편지, ‘으능나무와의 대화’에서 고려 공민왕 때 심은 고목에 대한 그리움을 잔잔하게 묘사합니다. 으능나무를 떠올리면 ‘크다’든가 ‘세월’이라는 귀중한 관념이 함께 떠오르기에 선생은 으능나무에 대해서 스승의 감정, 행복의 감정, 숭엄한 경탄의 감정을 느끼면서 동시에 외롭고 적막하고 의연한 그 모습에서 자신과 함께 하는 우주생명의 경건함을 사색합니다. 그리고 선생은 인사동에서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노래를 부르게 한 후 그 노래를 마지막으로 다음 날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회갑 일을 하루 앞두고 운명하였으니 만 60년을 에누리 없이 채웠지만, 회갑연 초청장은 부고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김 주간 “‘개똥모자에 핀 구름꽃’이라는 박영수 선생의 책 134쪽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서울 강남버스터미널에 내리는 날이면 버릇처럼 건물 안 서점에 먼저 들른다. 거기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상큼한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날도 그랬다. 흙속에서 빛을 발하는 ‘으능나무와의 대화’란 책을 찾아냈으니 말이다. “으능나무?” 책의 바다에서 볼품없는 밋밋한 곁 표지가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천년고목 은행나무를 놓고 ‘으능나무와의 대화’란 수필을 남긴 내 젊은 날의 문학 스승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글에서 박영수 선생이 민 선배를 ‘무소유의 철학자’라고 일컬으셨습니다. 그동안 철학은 논문으로만 대해 생동하는 인간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아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민 선배가 쓰신 것을 읽으면서 철학을 수필로 쓴다는 것의 필요와 그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제가 주관하는 교토포럼에서 만난 사카베 메구미 도쿄대학 철학과 교수가 저에게 말하기를 “그동안 도쿄대학의 아카데미적 권위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철학을 학술 논문으로 표현해 왔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생동하는 감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을 자주 느껴왔기 때문에 앞으로는 철학을 수필로 표현하는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몽테뉴와 파스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주에 와서 박영수 선생을 뵙고 철학은 수필로 써야지 논문으로 써서는 학위는 얻을지 모르지만 인간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민 선배의 ‘철학의 즐거움’이야말로 철학이 삶이 되고 삶이 그대로 철학으로 나타난 올곧은 삶의 철학을 수필을 통해서 친숙하게 현상화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박종헌씨가 한국의 대학철학을 시작했다면 무소유의 철학수필가 민 선배는 재야의 활명철학(活命哲學)을 창시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민병산 선배는 저에게 있어서는 철학자=철학전문가가 아니라 철학을 그대로 산 철학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그립다’는 우리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사전을 들춰보니 어떤 데도 만족할 만한 정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 마음 속에 오롯이 떠오르는 생각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움은 불현듯 잊혀진 과거가 지금 여기에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저는 그동안 민 선배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 분은 저의 의식 속에 존재하지 않는 잊혀진 분이었는데 박영수 선생의 책이 인연이 되어 불현듯, 갑자기, 순간적으로 과거 세 번쯤 만나 뵀던 그 분의 모습이 되살아나서 저의 사색과 실천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가도록 강하게 자극하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리움이란 그저 과거를 되살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잊혀졌던 과거를 소생시키면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가는 미래공창의 값진 순간이요 인연이요 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민 선배를 우리들의 미래공창의 동반자로 다시 살아나도록 하고 싶어서 기리고 선양하는 대화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제가 눈 여겨 보니 박영수 선생께서 ‘으능나무와의 대화’라는 책을 가지고 오셨는데 그 책에 연루된 말씀을 해 주십시오.”

 

▷박영수 수필가 “저는 수필을 쓰는 사람인데 민병산 선생을 ‘범석을 초월하며 순결을 찬미한 철학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글을 모은 책 제목이 ‘책에 미친 바보’입니다. 저는 이덕무가 조선 시대의 책에 미친 바보라면 오늘날의 ‘책에 미친 바보’는 민병산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아주 극히 드문 독서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임찬순 선생, 시내 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그 계기가 된 분이 민병산, 신동문 선생 두 분이십니다. 신동문 선생은 시인이라 다정다감하시고 참 말씀도 많이 하시고 술도 많이 자시고 친근하게 해줘 저희가 많이 따랐는데 민병산 선생은 술도 안 드시고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이 감성적인 면에서는 이 분과 접근이 잘 안됐고 청주에 계실 때 그 분과 친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서울로 가셨던 그 분이 어느 날 청주에 내려 오셨을 때 제가 마침 대성학원 학보를 만들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저에게 오라고 하시더니 어느 다방에서 연원에 대한 특집을 한번 엮어 보라며 몇 개 테마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으로 특집을 꾸몄습니다. 저는 민병산 선생은 ‘철학 에세이스트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으능나무와의 대화’라는 책이 서점의 무수한 책 더미 속에 눈에 띈 것은 ‘으능나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은 민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나온 추모문집입니다. 인사동 거리의 사람들이 돌아가신 지 20년 된 분을 잊지 않고 있다가 다방 마담까지 추모의 글을 써서 이 책을 낸 것을 보며 민병산 선생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깨달았습니다. 저는 서점에 주저앉아 이 책을 읽고 유족들에게 알렸지요. 민병구라는 민병산 선생의 동생이 서점의 책을 구입해서 유족들에게 돌렸다고 하더라고요. ‘철학의 즐거움’이라는 유고집은 돌아가신 지 3년 후에 나온 책인데 저는 수필들만 모아서 ‘민병산 수필집’을 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수필 문단에서 민병산 선생을 철학 수필가로 인정해 주는 계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문단에는 충북 출신 철학 수필가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철학 수필가로 김진섭, 김형석, 안병욱, 김태길, 황필호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중 김태길 선생은 청주, 황필호 선생은 증평 출신입니다. 제가 수필 강좌를 하며 수필 이론서를 10권 넘게 갖고 있는데 철학 수필을 수필의 종류로 다루는 곳은 한 곳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김시헌의 ‘수필을 말한다’라는 평론집에서 ‘수필과 문학의 촌수’, ‘철학수필과 상황 제시’를 다룬 부분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는 ‘인간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 즉 철학이 담겨 있는 수필’을 철학수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철학수필을 써야 하는 이유로 ‘신변수필 일변도에 식상한 독자가 많다. 지적인 독자에게 철학적 갈증을 충족시켜준다. 인생, 예술, 자연, 종교에 대한 근원을 알기 쉽게 밝힌다. 창작방법의 새로운 시도(다변화)를 통해서 경박해져 가는 현대문명에 대한 반작용’ 등을 거론했습니다. 그동안 철학수필을 기피한 이유를 지적하기도 했는데 ‘쓰기가 어렵다. 문학성이 약하다, 독자가 많지 않다. 작가의 철학이 얕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단 현실에서 볼 때 민병산 선생이 철학 수필가로 대접 받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2000년 청주문화원장이 되어 청주문화관에서 3년을 지내는 동안 중앙공원 압각수를 볼 때 마다 민병산 선생이 생각났습니다. 2000년에는 압각수가 죽을 뻔 한 일이 있었습니다. 봄이 돼도 꽃이 안 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시청에 전화를 해서 난리를 치기도 했는데 꽃이 한 달 늦게 나온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온갖 오염과 소음 속에서 천년된 고목이 살아남겠냐고 하더라고요. 서울에 있는 나무전문가가 와서 주사를 놓고 끈을 매고 돌을 쌓아 접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 봄이 되면 은행나무가 잘 있나 보러 그곳에 가는 것이 버릇처럼 됐습니다. 이 은행나무는 청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병산 선생은 외지에 나갔다 고향에 오면 꼭 은행나무에 왔습니다. ‘돌체 다방’이라는 글을 보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은행나무 밑에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난 것은 이어령씨가 일이 있어서 청주에 왔다가 함께 점심을 먹는데 “청주에 문인이 누가 있습니까?”하고 묻더라고요. 그때 제가 “민병산, 신동문”이라고 하니까 “민병산 선생이 청주분이시죠?”하더니 완전히 흥분해 “내가 제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으로 알았는데 민병산 선생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임찬순 선생이 문인협회 회장을 할 때였는데 청주시에서 김시습 시비를 산성에 세우게 돼서 청주 문인들이 들고 일어났었지요. 그래서 예산 3000만원 중 반을 줄여 청주 출신의 문인시비를 세우라고 해서 민병산 선생에 대한 문학비를 세우려고 올렸는데 당시 나기정 시장이 잘 몰라서 결제를 안 해주고 있었는데 이어령씨의 말을 듣고 나서야 슬그머니 결제를 해줬습니다. 저는 수필 쓰는 사람으로 우리나라 수필 문단에 민병산 선생을 철학에세이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김 주간 “저도 동감입니다. 우선 민 선배를 철학수필가로 자리매김하고 철학수필이라는 활동분야를 제대로 정착시키는 작업을 개시할 필요가 있고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태까지 없었거나 있어서도 희미했던 차원, 지평, 세계를 새롭게 열어서-개신(開新)해서-새로운 인물들이 거기서 낳고 자라고 키워지도록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미래공창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청주는 바로 개신의 고을이라는 생각이 있어서입니다. 그리고 청주를 ‘개신인문학(開新人文學)’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하고 싶어서입니다.”

 

▷임찬순 희곡작가 “민병산 선생은 청주 민씨 중 최고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본인은 한 번도 자신의 집이 부잣집이라는 말을 한 적 없다고 합니다. 저와 하숙을 1년 쯤 하는 동안 얼결에 민 선생이 “5000석 군의 손자다”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동생인 민병구라는 분에게 물어보니 얘기가 증조부가 1만5000석을 했고 장남에게 7000석, 민병산 선생의 조부에게 5000석, 동생에게 3000석을 나눠줬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의 아버지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에 유학해서 그런지 집에 장서가 굉장히 많았다고 합니다. 남한제사라는 기업체가 사직동에 있었는데 그것도 민 선생의 아버님께서 경영하셨던 것입니다. 어쨌든 어마어마한 부잣집의 손자로 태어나 장손이라 낳자마자 바로 조부가 데려가 자기가 키웠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변학자라는 분에게 글씨를 배웠다는 말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는 집 한 칸이 없었습니다. 후배들이 돈을 모아 원룸을 하나 사서 기거하시라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해 무소유로 떠나신 분입니다. 이렇게 태어날 때와 죽을 때의 편차가 어마어마하게 커서 이러한 인물이 과연 다른 곳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민병산 선생은 청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영정국민학교(현 청주 주성초)를 다녔습니다. 신동문 선생이 같은 반이었는데 당시 자가용 승용차는 충북에 단 두 대 뿐이었는데 민병산 선생은 이 자가용을 타고 학교에 등교했다고 합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아이들이 다 모여들어 전부 집어 갈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신동문 선생의 본명은 신건호, 민병산 선생은 민병익이었는데 당시의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평생을 막역지우로 살게 됩니다. 민병산 선생에 대해 세상에 알려진 정보는 대부분 다 신동문 선생을 통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민병산 선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회화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고 이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합니다. 1940년 독서회를 만들었는데 그 일로 당시 친구들과 함께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끌려갔습니다. 선생은 10개월 만에 나왔는데 친구들은 아직 그곳에 있다는 것에 미안함과 자책감을 느꼈고 그러는 동안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장도 못 받고 있다가 해방 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선생을 독서인으로 만든 계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감옥에 다녀온 다른 친구들은 독립운동을 했다고 뻐기는데 자기는 먼저 나와 ‘아 저 사람들 뭔가 잘못 짚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이한 일생을 보낸 것은 취업을 한 적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1955년에 충청일보 논설위원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신문사에서 만난 사람이 신동문 선생입니다. 신동문 선생이 당시 만난 민병산 선생의 얼굴은 거의 노인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956년에 청주상고 도덕 강사를 1년 정도 했다고 합니다. 그 강의는 굉장히 특이한 강의라 우리들에게 굉장한 감동을 줬어요. 학교 선생님이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 거의 홀딱 반하다시피 했습니다. 그 이후 충북문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하게 됩니다. 감투라는 것은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것이지요. 단 한 번도 집을 가져본 적이 없고 ‘새벽’, ‘창작과 비평’ 등 문학지와 여성 잡지에 글을 쓰며 생활을 했습니다. 그 분은 원고를 팔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청탁을 받아야 쓴다고 하셨습니다. 출판사에서 원고를 묶어 책으로 내려고 했는데 광고를 하는 것이 싫다고 해서 책을 못 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글을 썼는데도 책을 내지 않아 사후에 후배들이 책을 내준 것입니다. 직업을 하나도 갖지 않고 글을 써서 먹고 살았지요. 저와 하숙을 할 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명동에 가면 커피숍에 가서 그 분이 얘기를 하면 저는 주로 들었습니다. 그 때 들었던 얘기는 대학 교수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일을 하러 가면 그 이는 목욕을 하러 가 그때 대화한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는 것이 나무를 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생 동안 청주에 와서 나무를 심고 싶다는 얘기를 늘 하셨어요. 자기는 아무 필요도 없는 글이나 쓰는 사람이지 생전 농사를 지어 곡식을 생산해낸 적이 없다. 농사를 짓고 싶고 그걸 못하면 나무를 심어 크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가끔은 회사의 사장님, 회장님들도 오셔서 민병산 선생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갔는데 어떤 이야기도 막힘 없이 하셨어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고 한문 공부도 굉장히 많이 하셨어요. 어릴 때 초정 근처에 변영태씨라는 유명한 변학자가 있었는데 그 분에게 글씨를 배웠다고 합니다.”

 

▷김 주간 “김용환 교수께서는 민병산 선배의 ‘철학의 즐거움’을 정독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사람들이 민병산 선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에 관해서도 여러 모로 살펴보았던 것으로 아는데 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지요.”

 

▷김 교수 “민병산 선생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분으로는 시인, 평론가, 방송작가, 소설가 등 여러 분이 있었습니다. 신경림 시인은 민병산 선생에 대해 ‘심신이 지친 사람에게 편안한 눈동자를 선물하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방에 다니는 아가씨들은 민병산 선생이 주는 붓글씨도 좋지만 눈동자가 굉장히 편안했다고 했다고 합니다. 또 ‘배낭을 어깨에 걸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별난 걸음걸이를 걸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신동문 시인은 “초로 인생의 애 늙은이다”라고 했습니다. 신동문 시인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민병산씨를 두고 어머니가 “저런 사람과 사귀지 말라”며 못마땅해 하신 것 같아요. 민병산 선생의 얼굴은 30대에 이미 60대를 떠올리게 했다고 합니다. 신동문 시인이 “병익이(민병산 선생)는 쇠꼬리가 아닙니다. 몸이 늙은 것은 철학을 해서입니다”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철학이 뭐꼬?”하고 물었고 도저히 어머니에게 철학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는 세단을 타고 학교에 와 반찬을 싸오면 펼치자마자 힘센 놈들이 다 뺏어 먹고는 했는데 자기도 그 사이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려워서 못 갔다는 것입니다. 감히 친구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민병산 선생은 도시락을 빼앗아 먹은 친구를 나무라지도 않고 그저 먼 산만 바라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30대가 되어 만났을 때 그때 그 귀공자가 지금 이 사람인가에 너무 놀랐다는 것입니다. 평론가 구충서는 민병산 선생을 “한국의 디오게네스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고 참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김 주간 “잠깐, 민병산 선배를 ‘한국의 디오게네스’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잊어버리기 전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어서 말씀을 끊었습니다. 양해주십시오. 저는 민병산 선생을 그리스의 견유학파 철학자 디오게네스에 빗대고 뜻매김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안에서나 특히 나라 밖에 알릴 때 ‘민오게네스’라고 부를 것을 제안합니다. ‘민오게네스’의 ‘민’은 민병산의 ‘민’이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게네스는 ‘무엇무엇으로부터’ 또는 ‘누구누구로부터’ 출발, 발생, 시발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그리스말인데 민병산 선배로부터 출발, 발생, 시발된 본격적인 철학수필이라는 장르를 중시하고 그것을 통해서 아무 것에도 속박되지 않고 무엇에 집착하지도 않는 자유로운 영혼, 철저하게 탈식민지화된 영혼을 기리는 의미에서 민오게네스라는 에피세트를 붙이고 싶은 것입니다.”

 

▷김 교수 “또 평론가 조우석은 중앙일보에 연재된 ‘조우석 칼럼’에서 민병산은 ‘인자한 마음의 철학자’라고 했습니다. 인자함이 반영된 호롱불체 붓글씨를 다시 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비껴 살았기에 붓글씨도 정자체가 아니라 구불구불한 호롱불체로 정평이 났습니다다. 그 글씨에는 멋지게 한번 잘살아 보겠다는 욕심의 거품이 제거되어 있다는 평가입니다. 추사글씨체나 장일순 글씨체를 조금은 닮았지만 인자하고 세상을 달관한 그 마음이 호롱불체 글씨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론가 김종철은 민병산 선생을 ‘존재를 살아간 자유 시민’이라고 평했습니다. 장일순의 무소유가 종교색채가 농후하다면, 민병산의 무소유는 거리에서 터득한 지혜의 산물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 ‘독서회’ 사건이 계기가 되어 자괴감으로 집을 떠났으며 평생을 떠돌이로 살았다는 평입니다. 대부호 집안의 장손이자 맏아들로 귀공자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모든 상속을 포기하고 떠돌이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생계는 번역이나 바둑 평론, 수필 막노동으로 꾸려갔습니다. 민병산 선생은 ‘소유냐 존재냐’ 라는 물음에 대해 ‘존재’라고 응답할 것으로 짐작하였다 했으며, 평생 동안 ‘존재’의 가치를 몸소 생활로 실천한 철인으로 평했습니다. 농촌 소설가, 방영웅은 ‘기러기 훨훨 날아간다’는 노래를 들려줄 때, 민병산 선생이 이 노래를 듣고 ‘협동성의 덕목을 일깨운 철인’으로 평했습니다. ‘함경북도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대형을 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쫓아와서 약한 기러기를 공격하면, 기러기들이 힘을 합쳐 독수리를 격퇴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뒤처진 기러기를 힘이 센 두 마리 기러기가 달려와서 약한 기러기의 양 날개를 부축하며 함께 날아간다’는 한 동물학자 관찰기록을 유언처럼 전해주었습니다. 속사포 술꾼이자 소설가, 강홍규는 민병산 선생을 ‘큰 문장가요 위대한 익살꾼’으로 평했습니다. 평생 단순한 삶을 살았지만 사유는 깊이가 있었다고 전합니다. 민병산 선생은 히피에 관심이 많았다 한다. 스스로가 히피이며 소유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평가입니다. 점퍼 위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다녔는데, 그 속에는 싸구려물건이 있었지만 모두 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 혼자 사는 것이 그럴듯하다고 말해놓고 이제 무슨 염치로 장가를 들 수 있겠나’하며 ‘눈앞의 원고료 몇 푼이 탐이 나서 마음에도 없는 독신주의자가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신동문의 권유로 신구문화사에 잠시 근무한 경력이 있지만, 그는 평생을 독서와 집필에 몰두하였습니다. 제가 이 분을 생각하면 지금 여기서 민병산 선생을 불러 본다면, ‘고요한 성품에 고독한 사색을 즐긴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그는 붓글씨로 인걸의 무상에 대해 ‘산은 예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물이 있을쏘냐’는 구절을 남겼습니다. 1981년 성철스님이 조계종 종정에 취임할 때 남긴 ‘원각(圓覺)이 보조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법어와 대구를 이룹니다. 민 선생의 삶의 보따리는 관음이요, 그의 익살은 묘음이며, 그의 귀천은 고요로 돌아감입니다.”

 

▷김 주간 “민병산 선배는 1928년생입니다. 저하고는 여섯 살 차이에 불과한데 사유나 실천에 있어서는 20년이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놀랐습니다. 처음의 놀람은 ‘세대(世代)’ 1966년 6월호에 실린 ‘한국의 생활 문화’라는 글에 ‘필자는 그처럼 활발했던 국민 재건 운동이 길가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는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담높이 낮추기 운동을 전개하지 않은 것을 큰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당장에 모조리 철거하는 것이 어렵다 하더라도 높이를 반으로 낮추고 돌이나 벽돌 대신에 무슨 나무 울타리로 바꾼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나라 살림이 훨씬 명랑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민 선배의 생각이 나타나 있습니다. 저는 1986년에 청주여자사범대학(현 서원대) 시간강사로 있었는데 여학생들과 함께 코스모스 씨 뿌리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청주를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로 만든다는 젊은 시절의 정열을 학생들과 함께 펼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민 선배는 20년 전에 이미 ‘길가에 코스모스 씨앗을 뿌리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즉 20년을 앞선 생각이었습니다. 칸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철학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철학하기 위해서는 가난한 마음이 필요하고 가난한 마음이란 진리에 대한 굶주림이다. 앎에 대한 갈증이다. 앎에 대한 연모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민병산 선배는 철학을 산 사람입니다. 철학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철학을 좋아하는 것이 중요하고 철학을 좋아하는 것보다 철학을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민 선배는 어김없이 철학을 즐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놀람은 -이것은 더 큰 놀라움입니다- 같은 ‘세대’ 1973년 4월호에 실린 ‘전기류 모집의 재미’라는 글 속의 다름과 같은 민 선배의 생각과 실천입니다. ‘나의 독서경향은 소년시대로부터 주로 철학과 역사에 걸쳐 있었다. 경향은 뚜렷했다. 하지만 전문은 아니다. 전문이라는 것은 국가, 사회로부터 그 부문에 위촉을 받을 만큼 공공성(公共性)이 있어야 하고 본인도 그 책무를 느껴야 한다. 또한, 어떤 사회적 지위를 얻어서 거기에다 간판을 내걸어야 한다. 변호사 간판처럼 눈에 보이는 간판은 아니라도 번지가 있어야 하고 전문 분야가 있어야 한다. 헌법이면 헌법, 고고학이면 고고학, 의상디자이너면 디자이너 간판이 뚜렷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 사람의 취미,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은 공공철학(公共哲學)이 아니라 사철학(私哲學)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민 선배는 자기 철학이 사철학의 자리에서 공공철학의 위상으로 탈바꿈되기를 염원하는 의미에서 장래세대에게 도움이 되는 훌륭한 선인들의 전기를 모아 엄선해서 어린 꿈나무들에게 바르고 아름다운 꿈을 키우겠다는 전기 시리즈의 출판을 위해서 힘껏 애를 썼던 것입니다. 제대로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1990년에 일본으로 가서 1993년 4월부터 도쿄대학 법학부의 교수들과 공공철학 대화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공공철학 교토포럼으로 이름을 바꾸고 명실공히 세계적인 철학대화운동으로 발전해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철학이 아닌 공공철학의 결실을 알차게 맺게 되었습니다마는 여기에도 20년의 격차가 있습니다. 민병산 선배는 공공철학과 장래세대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저보다 20년을 앞선 선진이요 선각자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겁니다. 서양에서 Public Philosophy(공공철학)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썼던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 윌터 리프맨(1889~1974)이 1955년에 출간한 The Public Philosophy였으니까 약 2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시간차입니다. 또 제가 세계 여러 나라 전문가들과 장래세대에 대한 현재 세대의 책임과 배려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고 실천했던 성과를 책-3권의 영어책-으로 정리, 출판했던 것이 1994년이었기 때문에 세대 간의 공공하는 사유와 행동에 있어서도 민 선배와는 20년의 격차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운 청주인’으로 민병산을 빼놓고 다른 분을 말할 수는 없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30년 가까이 공공철학 대화 운동을 벌여왔는데 그 분은 제가 생각하기 이미 20년 전인 1973년에 이미 자기가 한 철학은 사철학에 지나지 않으니 한 발짝 나아가야겠다는 자각을 하고 책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철학한답시고 책도 많이 읽곤 했지만 이것은 개인의 취미나 취향이니 사철학이고 공공성을 가진 공공철학을 해서 후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병산 선배가 남기신 뜻을 제가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민병산 선배를 철학수필가로 자리매김하고 나 자신도 그 길을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그 분은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정부나 국가로부터 위촉을 받지도 않았고 변호사, 고고학자, 의상디자이너처럼 전공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살았지만 마음 속 깊은 데서는 공공철학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조금이나마 이루는 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우리의 선배들이 그 분을 높이 평가했고 이미 열려져 있는 길이기에 우리가 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동안 민병산 선배는 완전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분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그때 이미 이름이 난 분들이 민병산 선배를 높이 평가했었다는 김용환 교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임 희곡작가 “최고 갑부에서 최대 빈부까지 거리를 그만큼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엄청나게 느껴졌어요. 하루는 민병산 선생이 집에 가서 뭔가 찾아오라고 해서 뒤지다 보니 수첩이 나왔는데 그 속에 유서가 있더라고요. ‘내가 죽으면 학용품은 병구에게 전하고 책은 문수와 명희에게 주길 바란다’는 간단한 내용을 읽고 섬뜩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김 주간 “최고의 갑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호사를 마다하고 청빈하게 살다가 빈곤 속에 돌아가셨지요. 그런데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삶의 방식으로 그 길을 간 거니까 그 분 나름대로 평안스런 심경이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임 희곡작가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그분이 어마어마하게 독서를 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엄청난 독서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개조한 것 아닐까요. 그 분은 다방면에 박식했는데 스포츠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이 알고 중국고사도 얼마나 재미있게 말씀을 잘 하시던지요. 그런 것이 자기 혁명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거든요. 마지막에 후배들이 방을 쓰라고 하는데 설득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갈 수 있을까요.”

 

▷김 주간 “민병산 선배에게 청주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박 수필가 “그 분이 청주에서 유일하게 좋아한 건 으능나무였어요. 그리고 청주에 뭐 볼 게 있느냐는 얘기를 간혹 하셨어요. 민가네 집이 친일재산이 많은 문제로 논란이 됐을 때 민병산 선생도 그 후손으로 거기에 연루해서 보는 시각이 좀 있었지요. 그런데 민병산 선생은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어요. 이 분 대에 와서 그렇게 많은 재산이 물려진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서 출발부터 무소유로 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어떤 두 사람에게서 전화가 오기를 민병산 선생의 책 ‘철학의 즐거움’을 갖고 있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빌려줄 수 있느냐고 해서 빌려줄 수는 없고 그냥 보여줄 수는 있다고 했지요. 무슨 얘기냐면 근래 들어서면서 민병산 선생에 대한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청주 분들이 많아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민병산 수필집이 나왔으면 좋겠고. ‘철학의 즐거움’도 비매품으로 500부 정도 찍어 도서관에 보급하고 깨우침에 도움이 되는 글을 널리 보급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임 희곡작가 “청주 발산공원에 민병산 선생과 신동문 선생 두 분의 문학비가 세워져있어요. 박영수 선생이 청주문화원 원장으로 계실 때 문화원에서 두 개의 시비를 세웠어요. 평생 막역지우였던 두 분이 문학비까지 나란히 있게 된 것은 남다른 두 분의 인연을 말해주는 것으로밖에 달리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박 수필가 “청주에는 문학관이 한 곳도 없어요. 그런데 청주의 20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의 인제군은 문학관이 네 곳이나 있습니다. 최근 청주에서 신동문 문학관이 거론되고 있는데 자료가 거의 없어 신동문 선생만 갖고는 문학관 짓기가 힘듭니다. 민병산 선생과 신동문 선생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청주 문학관을 발산공원 근처에 건립하면 어떨까 합니다. 지금 점점 그 분들의 유품이 없어지고 있어요. 민병산 선생의 글씨도 구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서울 인사동 근처에는 많이 나돌아 다니는데 청주에는 고서점에서도 민병산 선생의 책을 볼 수가 없어요. 민병산 선생을 문인으로 예우하자는 겁니다. 이번 포럼을 통해 민병산 선생을 기리는 물결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김 주간 “청주가 젓가락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앞서간 청주인을 기리고 장래세대에게 그 분들의 삶의 모습이 제대로 기려지는 곳으로 이름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고장 사람을 키우고 아끼는 기풍이 청주로부터 나라와 누리로 확산, 전파되는 발원지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여러분 이 모임을 가능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조아라·사진/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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