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중원대교수)

▲ 이상주(중원대교수)

‘화양구곡정신’이 ‘항일정신’이다. ‘항일정신’이 ‘화양구곡정신’이다. ‘화양구곡정신’이 ‘위정척사정신’이다. ‘위정척사정신’이 ‘존화양이정신’이다. ‘존화양이정신’이 ‘존주대의정신’이다. ‘존주대의정신’은 ‘도통(道統)정신’이다’. 뭔 말인지 도통 정신이 없겠다. 정신을 차리면 살고 정신을 잃으면 죽는다. ‘화양구곡정신’을 계승하면 살고 계승하지 못하면 죽는다.
 존주대의(尊周大義)는 제후가 천자(天子)의 나라를 높이는 의리이다. 공자는 “춘추”라는 책을 지어 중국 주(周)왕실을 높였다. 중국 송나라 주자가 존주대의를 중시했다. 조선조에 이르러는 중국의 예악문물(禮樂文物)을 높이고 예의가 없는 오랑캐들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조선시대엔 통상 명(明)나라를 존숭하고 청(淸)나라를 배척하자는 논리의 근거로 썼다. 이런 논리를 제기한 선구자가 우암 송시열이다.
  ‘중화문물을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말이 ‘존화양이(尊華攘夷)’다. ‘존주대의’와 내용은 같은 데 어휘를 바꾼 것이다. ‘정(正)’은 중국문물이 존주대의이며 ‘사(邪)’는 사악한 것 즉 서구 제국주의자들과 일제를 가리킨다. 내용은 같은데 용어를 바꾼 것이다. 그 시대상황에 맞게 어휘를 바꾼 것이다. 쉽게 이해하게하기 위해 다음 예를 든다. ‘강간’을 ‘성폭행’으로, ‘매춘’을 ‘성매매’로 쓰는 것과 같다.
  송시열과 그 문하생 권상하와 민진원은 화양구곡에 ‘도통의식’과 ‘존주대의의식’을 표상화하였다. 이후 우암을 숭앙하고 ‘존주대의의식’을 계승한 사림들은 화양구곡을 성지로 순례하였으며, 화양구곡시를 지었다.  특히 조선말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라는 이적(夷狄)의 위협에 항거하기 위해, ‘존화양이의식’을 더욱 공고히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선비로서 국난을 맞아 진충보국의 유교적 애국심을 견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화양이의식’, ‘항일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화양구곡을 순례했다. 그리고 적극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이런 양상은 식견있는 사림들에게 나타나는 전국적 현상이었다. 첫째, 경남지역 사림들을 보자. 정환주(1833~1899)는『대명충의록(大明忠義錄)』을 작성했다. 그는 주자 정여창  송시렬의 도(道)를 흠모했다. 정봉기(1861~1915)는 지금 경남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송병선(1836~1905)과 최익현(1833~1906)에게 배웠다. 조카 정한용(鄭瀚鎔)이 진주성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동참하였다. 이직현(李直鉉1850~1928)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11월 서울에서 의친왕인 이강 및 대한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 선언서에 이직현도 서명했다.
 둘째, 호남지역 출신들을 보자. 조종덕(1858~1927)은 전남 순천 출신이다. 조종덕은 송시열의 9세손 송병순(1839∼1912)의 제자이다. 조종덕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소화둔인(小華遯人)이라 자칭하고 경전과 주자서를 탐독하면서 은둔했다. 조우식(1869년∼1937)은 곡성출신으로 최익현의 제자이다. 최익현은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이다. 조우식은 1906년 1월 25일 최익현이 전북 태인 무성서원에서 발기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셋째, 경기 강원 출신이거나 충북을 무대로 활약한 사람을 보자. 유인석은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문하에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춘추대의정신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을 철저히 학습했다. 1871년 1888년 두 번 화양구곡에 와서 만동묘를 참배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 12월 24일(음력)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박세화도 화양구곡을 참배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가재조(國家再造)를 위한 정신이 절대 필요한 시점에 있다. 시대에 적합한 시대를 응집할 국민을 결속할 정신이 필요하다. ‘화양구곡정신’을 참고하여 시대에 맞는 ‘국론통일정신’ ‘한국신기상정신’을 형성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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