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영 <괴산문화원장>

앞산을 덮은 순백의 눈을 보며 커피 한잔을 들고 섰다. 70대 중반을 넘어서는 나이에 왜 어린 학동 시절이 이렇게 선명한지.
 내 고향 괴산군 청안면 장암리 장척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메산골이었다.
코흘리개 어린애가 훈장님 상투머리의 이를 잡아주며 ‘천자문’을 떼고 ‘동문선’을 배우다 장암초(당시 국민학교)가 개교되면서 3학년으로 적년 월반 했다.지금으로부터 64~5년 전 이다.
그 시절은 같은 학년임에도 연령차가 보통 5~6세였다. 6.25사변 직후라 먹고사는 것이 힘겨워 향학열이 높은 집안에서나 초등학교라도 보냈지 대부분은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주어야하는 가난에 찌든 세월이었다. 당연히 보자기 하나면 책가방으로 만족하던 시절이었으니 공부방은 사치요, 책상은 호사였다. 어쩌다 공부 좀 하는 고학년 집 사랑방 등에서 석유등잔 호롱불을 켜놓고 방바닥에 엎드려 서로 가르쳐주고 배울 수 있음이 행복이었으니 바로 우리 건넌방이 그 장소였다.
밤낮으로 친구들이 우리집에 들락거리며 장난질과 공동으로 숙제도 하던 그때, 학교에서는 청소반장이란 직책을 얻어 수업 마치면 담임선생님께 청소검사를 받는 것이 사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늘 하던 대로 청소검사를 준비하던 중 교실 구석에 쌓아놓은 책상을 보며 문득, ‘아, 쓰지 않고 쌓아 놓은 책상 3개만 가져가서 우리 사랑방에 놓으면 공부할 때 불편을 덜고 공부도 잘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청소검사를 마친 후 짚으로 새끼를 꽈서 힘이 센 애들은 책상을, 힘이 약한 애들은 걸상을 6명이 나누어 짊어지고 사랑방에 차려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공부방이 꾸며졌다.
그렇게 우리들의 행복했던 보금자리인 공부방을 쓰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부르셔서 교무실에 가니 다른 선생님들이 듣지 않게 “재영아, 너 책상 가져갔니?” 하고 물으신다.
“예”하고 대답한 후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네 뜻은 참 좋으나 학교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면 안 되니 갖다 놓으라”고 하셨다. 아깝고 아쉽지만 선생님의 지시여서 책상과 걸상을 모두 원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선생님의 배려로 책상을 돌려놓았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반장 그룹.
그들은 나처럼 나이가 어리고 힘도 세지 않은 청소반장보다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한 그룹으로 나이도 5세 이상 더 먹었으며 주먹 또한 매서워 우리들 위에 군림하던 동급생이지만 상급생처럼 행세하던 몇 명의 그룹이 있었다. 모범생이며 선생님들에게 귀여움을 받던 내가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혔던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책상 사건’을 빌미로 그들은 나를 책상도둑으로 몰며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 요즘 말로 ‘왕따’를 시켰다.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 둘 수도 없고 그들과 맞서서 싸울 수도 없으니 어린 나이에 당한 괴로움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심각했다. 그렇게 고민한 끝에 내린 생각이 바로 ‘그 애들이 담배를 피우니 담배를 사줘서 입막음을 하자’는 묘안이 떠올랐다. 먹고 살기도 힘겨운 집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졸라 용돈을 얻어냈고 ‘샛별’ 담배 한 보루를 사다준 덕분에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때 반장그룹 아이들에게 바친 그 담배 뇌물이 혹시 기네스북에 ‘최연소자의 뇌물’로 기록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졸업 사은회 때, 담임선생님께서 “재영아” 하고 부르시더니, 어깨를 다독이며 눈시울을 붉히시며 “너 같은 정신과 기백으로 공부를 더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텐데…, 지금은 비록 중학교 원서조차 못 쓰지만 나중에 꼭 더 배워야한다”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다. 그 말씀의 힘으로 살아온 덕분에 오랜 공직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설 수 있었으리라.
산천을 수놓은 은백의 세상을 바라보다 어느새 동심에 젖고, 일생동안 잊을 수 없는 훌륭하신 그 담임선생님의 발자취가 그리워지는 오후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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