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스적층세공법’ 신기술·디자인으로 IMF 파고 넘어…
부친 손기술 이어받아 한국대표 귀금속 세공기술자 우뚝
우송정보대 출강 경험 후학양성 기본 토대 인성 강조

▣충북거주 ‘대한민국 명장’을 찾아서-이순용 귀금속가공명장

 

이순용 귀금속가공명장이 거북선을 만들고 있다.

(동양일보 경철수 기자)충북 음성에 거주하는 이순용(64·사진) 귀금속가공명장은 49년간 귀금속 세공 및 디자인 개발에 몰두하며 관련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에 대한민국명장 반열에 올랐다.

경북 영덕이 고향으로 대장간을 운영하던 아버지의 손기술을 이어받아 어렸을 때부터 농기구 등의 작은 소품 만들기를 즐겼다.

충북과의 인연은 산 좋고 물 좋은 처가의 장독대가 예뻐 눌러 앉은 지 4년 정도가 됐다. 서울 종로에서 ‘Lee보석 이순용 디자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이 명장은 하루 3시간 출·퇴근 시간을 빼앗겨도 ‘흙 내음 가득한’ 음성이 좋다고 한다.

이 명장은 1970년 5월 서울 종로 3가 소재 귀금속 세공업체인 ‘은성사’에 처음 입사해 세공기술을 익혔다. 10년간 견습공으로 기초를 닦은 뒤 1995년 대구 ㈜크라이스사(옛 정금캐스팅)로 이직해 그간의 역량을 발휘, 신기술과 디자인 개발로 크라이스를 국내 선두 귀금속장신구 제조업체로 성장시키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명장은 1995년 4월 미국 로스엔젤레스(LA) 한 쥬얼리 업체에서 2개월간 연수를 하며 쌓은 인맥으로 1997년 외환위기(IMF)가 발생했을 때 크라이스사의 수출 활로를 개척해 100만~1000만달러의 수출탑을 잇달아 수상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그가 미국 LA연수 당시 개발한 왁스적층 성형기법으로 국내 최초 쥬얼리 인비저블 세팅 제품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는 등 신기술 보급에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이 명장은 1995년 현대장신구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6년 24회 일본국제진주디자인 콘테스트에선 작품명 ‘아침이슬 브로치’로 4위, 자유부문 작품명 ‘바닷가 이야기 브로치’로 5위를 차지하며 동시 수상으로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1997년에는 ‘더 에어 쇼’란 작품명으로 25회 일본국제진주디자인 콘테스트 자유부문에서 다시 한 번 4위를 차지했고, 2002년 6회 삼신국제다이아몬드디자인 공모전에선 ‘일편단심 브로치’로 은상을 수상하는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쥬얼리 디자이너로 명성을 얻게 됐다.

각종 작품전으로 귀금속 세공기술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해 왔다. 2000년 9월 대구과학대 보석디자인학과가 주최한 1기 귀금속디자인전문가 작품전 참여를 시작으로 그해 12월에는 서울 가나아트 갤러리에서 15회 한국장신구디자인 협회전, 2001년 5월 서울 중소기업중앙회 중소기업과 전문대 산학협동 디자인 전람회에 참여했다. 이 명장은 지금도 매년 8월이면 한 달간 경북 청도 와인터널에서 정기적으로 ‘창금회’ 회원전을 갖고 있다. 2000년 설립된 창금회는 현재 명장 3명을 포함 19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은 고 이석범 선생의 손자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 명장은 1997년 11월부터 대구 달서구 불우 장애인 세대에 매월 3만원씩 후원하는 것을 비롯해 한국기능장애인협회에 1999년 9월부터 수시로 정성을 보태는 등 사회공헌 사업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2012년 3월부터 2016년 2월말까지 4년여 간 우송정보대 강단에도 섰던 이 명장은 후학 양성에도 매진하고 있다. 1995년 서울산업대에 500만원의 대학발전기금을 기탁했고, 2003년에는 대구과학대 보석디자인학과와 산·학협동 협약서를 체결하고 평생 교육원 출강을 통해 자신이 개발한 세공기술인 왁스적층기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이 명장은 “후학 양성을 위해 직업의 세계 진로 강연을 하며 느낀 점이 있다”며 “물질(돈)도 좋지만 인성교육이 우선시 돼야 아름다운 작품도 만들 수 있고, 내가 돕지 않으면 남도 자신을 돕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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