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생명·반민중’의 근본악과 끊임없이 싸운 저항의 시인”

동양포럼 좌담 ‘그리운 청주인 Ⅱ’에서 참석자들이 신동문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박영수 수필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박정희 시인, 김용환 충북대 교수, 유성종 동양포럼 위원장, 박장미 동양일보 기자.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은 지난달 20일 박영수(79) 수필가, 박정희(82) 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54) 한양대 교수, 김용환(62) 충북대 교수를 만나 ‘그리운 청주인’의 두 번째 순서로 신동문 시인에 대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이날 좌담 내용을 요약, 정리, 보충해 싣는다. <편집자>

 

김태창 포양포럼 주간

▷김태창 동양포럼 주간 “오늘은 ‘그리운 청주인’의 두 번째 순서로 인간 신동문에 관해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신동문’하면 ‘강’이라는 시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먼 물굽이 / 너 떠나고 난 뒤의 / 머언 물굽이 / 종일토록 오늘도 / 먼 물굽이…. 이 시는 신동문 선배가 스무살 때 썼다고 하니까 1947년에 쓴 것인데 바로 그해는 그가 런던올림픽 수영 후보선수로 선발돼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에 유학할 뜻을 세웠다가 결핵성 늑막염이 발병해서 올림픽 참가와 영국유학의 뜻을 포기하기 1년전입니다. 그런 그의 꿈이 ‘먼 물굽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강’이라는 시에서 호흡의 율동이 같음을 느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때 한때 심취했던 바이론(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라는 영국 시인의 영향을 받아 시인이 되고 싶어서 영어와 독일어, 불란서어로 된 시들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우연히 쟝 콕토(Jean Cocteau)라는 프랑스 시인의 ‘Mon oreille est un coquillage / Qui aime le bruit de la mer’를 ‘내 귀는 소라껍질 / 바다 우지짐을 사로워 하는’이라고 번역한 김기림의 시감각에 위화감을 느끼고 ‘내 귀는 소라 / 바다 파도소리를 / 그리워 하는’이라고 저 나름의 번역을 해놓고 마음 흐뭇함을 느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신동문 선배의 시와 저의 번역시가 똑같이 5-7-5의 운율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적지 않게 놀랐기 때문입니다. 장 콕토의 시도 5-7조로 되어 있고 5-7-5가 저 자신의 시율감에도 맞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그것이 일본 ‘하이꾸(俳句)’의 시형이라는 것을 알고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접하게 된 신동문 선배의 시에서 남다른 공진의 희열을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 저 자신이 썼던 시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나는 질그릇 / 영원을 담아놓은 / 질 그릇이오. / 나는 질그릇 / 무한을 얼싸안은 / 질그릇이오. / 나는 질그릇 / 하늘을 사모하는 / 질그릇이오’(‘나는 질그릇’)와 ‘나의 조국은 / 백성이 주인되는 / 민주의 나라 / 나의 조국은 / 백성이 대접받는 / 민주의 나라 / 나의 조국은 / 백성이 활개치는 / 민주의 나라’(나의 조국) 두 수 뿐입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6.25전쟁 중에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시골 깊숙이 피난하고 있었는데 외국어 공부와 시를 쓰는 일로 비참한 시절을 이겨냈습니다. 그 동안에 쓴 시가 백수 정도 됐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모두 박목월 선생에게 보내서 지도를 바랐는데 시 보다는 학문연구에 힘쓰는 것이 좋겠다는 답장이 와서 시작(詩作)을 포기하고 그것을 모두 불태워서 없앴습니다. 그때의 저의 꿈은 시와 음악을 함께 아우른 시인음악가 또는 음악시인이 되는 것이었는데 시인의 길은 박목월 선생의 충고로, 그리고 음악의 길은 부친의 완강한 반대로 이룰 수 없게돼 체념과 실의의 아픔을 안고 학문-인문학-의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 정치학과 법학,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과 유럽에서 정치 철학과 국제 관계론을 연구한 후에 충북대에서 영어와 프랑스어, 라인터 그리고 그 후에 인류문학과 지구사회라는 과목을 신설해서 가르쳤기 때문에 시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신동문 선배와는 가는 길이 달랐습니다. 세 번이나 만났지만 별로 통하는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그러니까 198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점으로 일본 국내·외의 뜻을 같이하는 여러 분야의 일본인, 외국인 전문가들과 함께 25년동안 공공철학대화 활등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거론되었던 갖가지 중요한 문제 가운데 우리 사회에 없을 수 없는 ‘근본악’이 무어냐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일본인 일본정치사회사상전문가가 일본에 있어서 ‘근본악’은 ‘반천황(反天皇)·반권력(反權力)’이라고 단정 짓고 나서 한국에 있어서 근본악은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불현 듯 뇌리에 번갯불처럼 떠오른 생각이 다름 아닌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호생지덕(好生之德:무엇보다도 백성과 뭇 생명체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려는 실천의지)였기 때문에 일본과의 대비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겨레의 원초적 사상에서는 반생명·반민중이 근본악이며 따라서 근본선은 친생명(親生命)·친민중(親民衆)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것 저것 읽던 중 신동문 선배의 시집 ‘내 노동으로’와 산문집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그리고 김판수 저 ‘시인 신동문 평전’을 읽어보고 그야말로 ‘반생명·반민중’이라는 근본악과 타협 없는 싸움을 일생을 두고 계속했던 신동문 선배의 투혼(鬪魂)의 결렬함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단양농장으로 들어간 후에는 그야말로 친생명(親生命)·친민중(親民衆)의 생활로 일관했던 점이 저에게는 크게 공감되는 바가 있어서 새삼 그리움을 느꼈습니다. 그런 연유로 두 번째의 그리운 청주인으로 신동문 선배를 여러분과 함께 기리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저는 신동문 시인의 전집과 평전을 발간해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통로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동문 시인의 경우 그 중요도에 비해 대중적 흡입력이 여러모로 불리합니다. 전문가들 빼고 대중들에게 각인되고 애송되는 시의 형식적 원리는 짧은 단형 서정시입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정지용의 ‘고향’ 등의 작품처럼 말이죠. 한용운이나 조지훈 시인도 좋은 작품을 많이 발표했지만 형식적 특성상 많이 애송되지는 않습니다. 신동문 시인도 마찬가지로 단형 서정시와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산문시가 많고 인지적인 충격을 주는 시도 많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대중들에게 애송되거나 기억되는 측면에서는 취약합니다. 시는 짧고 경제적이고 함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대적인 진실이며 항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정형시가 있었지만 근대 인쇄술의 발전으로 외우는 시에서 읽는 시로 트랜드가 바뀌고 장문의 시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중들이 시를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는 초, 중, 고의 교과서입니다. 시를 전공하지 않는 이상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시가 마지막인 것입니다. 교과서의 특성상 긴 시, 외설적인 시, 반체제 시 등은 실을 수 없습니다. 짧고, 간결하고, 쉽고, 대중적인 흡입력이 있는 시만 실렸습니다. 그렇다 보니 한국시에서도 짧고 간결한 시가 주류를 이뤘고 대중들이 단형적으로 시를 공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길고, 난잡하고, 사유가 중첩되는 시. 임화, 김수영, 신동문 등의 작품들은 대중적인 것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신동문 시인도 서정적인 것을 기조로 잡은 적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예외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실을 수 없는 시 중 반체제, 반 권력적인 시를 이야기했습니다. 반 권력이라고 할 때 한국시들은 두가지 거대한 권력과 싸워왔습니다. 하나는 일제강점기 일본이라고 하는 거대한 악입니다. 해방 이후 교과서에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는 내용의 시들은 명쾌하게 실렸지만 해방 이후를 다룬 시들은 실리기 어려웠습니다. 집권자들 때문이죠. 당시 교과서는 권력의 산물이었습니다. 신동문 시인은 이런 점에서 불리합니다. 시가 짧았더라도 권력과의 싸움을 주지로 하는 시는 교과서에 실릴 수 없었습니다. 신동문 시인은 명백하게 양심적인 시인이었습니다. 참여적 정통의 핵심에 서있습니다. 김수영 시인도 반체제적인 시가 많지만 ‘풀’과 같은 상징적인 시들은 교과서에서 볼 수 있어 조금 다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동문 시인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들은 한국문학사에서 기억할만한 이채로운 시인이라고 평가하지만 이러한 한계 때문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신동문 시인은 문단활동을 잘 하지 않고 사교적인 활동도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표상으로 만들고, 그의 문학사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불리한 여건입니다. 그러나 충북의 유일한 시 전문 계간지 ‘딩아돌하’에서 신동문 시인을 알리는데 많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단사교에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소외시켜 고독을 택한 그의 선택은 문인의 말년이 어때야 하는지 세상에 메시지를 던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전까진 신동문 시인이 한국 문학사에 주류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신동문적인 어떤 것이 한국 시의 한 부류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의 시 정신도 상당히 고귀하지만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형식이나 장치와 같은 지적인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동문 시인의 시 정신과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진적으로 해석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동문 시인의 정치적인 지향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당시 한국시의 비전을 보이고 사회에 대한 참여적 열정으로 스스로를 주류에서 소외시켰습니다. 부드러운 서정시가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 지역문인으로써 반문학사적인 새로운 시도를 한 신동문 시인을 청주의 새로운 표상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 주간 “시인 신동문의 한계에 관한 지적이 있었습니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실수 있습니까?”

▷유 교수 “신동문 시인의 한계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은 아니지만 시인으로서의 삶이 짧았다는 것입니다. ‘휴전선’의 박봉우의 경우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굴곡진 삶 만큼이나 평전도 두껍습니다. 그와 비교했을 때 신동문 시인은 평전도 그리 두꺼운 편은 아닙니다. 박봉우 시인의 경우 민중 통합을 호소했고 신동엽 시인은 민중적 서사를 거대한 서사로 이끌었습니다. 신동문 시인은 키워드가 ‘민주’였습니다. 민주주의의 훼손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한 사람입니다. 이채로웠지만 대중에게 기억되고 수용되는 원리가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인 독특함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저는 한계가 명백한 것이 오히려 더 훌륭한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동문 시인의 시인으로써의 삶이 짧다고 해서 작품이 많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다른 매체에 발표한 작품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해야 합니다.”

 

김용환 충북대 교수

▷김용환 충북대 교수 “신동문 시인은 충북 문의군 산덕리에서 태어나 단양 수양개 마을에서 삶을 일궜습니다. 두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제강점기를 살았기에 그의 삶은 항상 배고프고 가난했습니다. 5살에 청주로 이사와 8살 무렵부터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건강이 가장 큰 콤플렉스였습니다. 하지만 질병으로 개체생명의 소중함을 자각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1946년 서울대 문리과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을 미처 마련하지 못해 2학기에 학업을 포기하고 신흥대학(경희대학교)에 수영특기생으로 편입하여 등록금을 면제받았습니다. 폐결핵 병자가 웬 수영이냐고 할지도 모릅니다만. 폐결핵을 치유할 목적으로 명암저수지에서 수영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1947년 봄 대한수영연맹에서 대표선수 후보 10명을 뽑았는데 신동문 시인도 거기에 뽑혔습니다. 선수로 뽑히면 런던 유학을 갈 수 있어 희망을 품고 연습에 몰두 했지만 연습 도중 늑막염에 걸려 신흥대를 자퇴하고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이후 1951년 공군에 자원 입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36개월 중 23개월은 공군병원 요양소에서 보내다 제대했습니다. 병마와 싸우면서 데뷔작이기도한 장편연작시 ‘풍선기’를 썼습니다. 이 작품에는 시인의 가난과 건강 문제가 반영돼 있다고 봅니다. ‘제 3포복’은 폭력에 대항하는 시적인 마인드가 녹아있습니다. 전쟁의 비정함과 인간존엄의 상실에 대한 고발을 통해 현대문명이 폭력으로 군림한다는 자각을 반영했습니다. 2004년 솔 출판사에 의해 유고 시집 ‘내 노동으로’와 함께 유고 산문집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발간됐습니다. ‘내 노동으로’는 시를 쓰고 문학에 의존하기 보다는 직접 노동에 참여하며 삶을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에서 행동하지 못하고 단지 생각만하는 존재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시인은 ‘나’를 전제하지 않았습니다. ‘나’가 없습니다. 1969년 ‘창작과 비평’의 발행인을 맡으면서 경영에도 주력해 좋은 안목으로 수준 높은 문예지로 키우고 많은 문인들을 발굴했습니다. 그가 발행인으로 있을 때 독자 투고문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삭제 하지 않은채 원문 그대로 실어 북한 찬양문제로 비화돼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군국주의, 제국주의에 대항한 베트남 민중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의 글을 실어 긴급조치 위반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신경림 시인의 증언에 의하면 상당한 압박과 수모를 당했고 각서까지 써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경림 시인은 그의 절필의 원인이 중앙정부부에 끌려가서 혹독하게 고문을 당한 후에 나가면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62년부터는 단양 인근에 4만평 규모의 농장을 만들어 노동에 몰두합니다. 그 의식이 ‘내 노동으로’에 반영돼 있습니다. 주목할만한 것은 1965년 발표한 ‘모작조감도’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이 무서워 선글라스를 못 벗고, 국민은 그를 더욱 무서워하고 박정희는 더욱 짙은 색깔의 선글라스를 써야 하고, 마침내 국민도 더욱 그를 무서워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민주화에 대한 이상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작품입니다. 이중적이며 폐쇄적인 독재의 이미지를 선글라스에 투영하고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의 불행과 연관 지으며, 시인 이상의 ‘오감도’의 형식을 모방했습니다. 신동문 시인은 시인들 가운데 김수영과 신동엽을 좋아했으며 자주 교분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특히 김수영의 죽음에 자책감을 가졌습니다. 충주댐 건설로 수장되었지만 신동문은 필화사건을 계기로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하는 노동에 관심을 갖고, 수양개 마을 뒤편의 4만평의 임야는 독재와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던 시기였던 당시 그에게 큰 위안을 줬습니다. 그는 누에를 치기 위해 뽕나무를 기르는 것 이외, 여러 개의 간이농막을 지었습니다. 1966년 민음사에서 펴낸 번역서 ‘요가’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적잖은 인세를 받았고, 부인 남기정도 살림을 꾸리며 몇 차례 부업을 가짐으로 가사에 도움을 줘 땅을 매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75년 가을 서울에서 수양개로 홀로 이주해와 정착했습니다. 1993년 가을 작고할 때까지 꼬박 18년을 이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농장과 침술원은 농촌사회의 지역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의료공동체 역할을 하면서 다양하게 변모시켰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을이 대청댐 건설로 수몰되고 농장도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며 노동자로 살고자 하는 뜻을 제대로 피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를 제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노동을 하고 시를 쓰는 대신 침술을 통해 시쓰는 마음으로 마을 사람을 보살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당시 ‘건설입국’ 구호에 의해 1977년 낙동강 줄기에 안동 다목적 댐이 세워졌습니다. 수양개 주민들은 1982년부터 한두 가구씩 서서히 마을을 떠나기 시작해 어느새 그를 포함한 세 가구만 남게 됐습니다. 젊을 때 폐결핵을 앓으면서부터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자주 찍었고 많은 술로 인해 발병한 담도암으로 1년 4개월을 투병하다가 추석을 하루 앞둔 1993년 9월 29일 예순여섯을 일기로 숨을 거뒀습니다. 장기 기증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그가 각막과 장기를 기증한 것은 굉장히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신동문 시인도 ‘낙동강’이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과거 ‘아! 신화 같은 다비데군들’을 떠올리며 자신이 종로에서 4.19 데모를 하면서 받은 흥분으로 하숙방에서 엎드려 지은 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7년 ‘내 노동으로’를 발표한 이후 더 이상 시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너무나 강해 자신은 군부독재에 의해 절필된 시인이 아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시를 그만 쓰게 됐으며 이후 노동과 침술로 관심이 바뀌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유성종 동양포럼 위원장

▷김 주간 “앞서 두 분은 직접 신동문 선배를 만나거나 사귀고, 교제한 일이 없었던 상태에서 인간 신동문의 작품, 평전 등을 읽고, 특히 시를 통해서 떠올린 신동문 상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새삼스럽게 느낀 바가 있습니다. 저는 세 번 직접 만났고, 말도 들었고, 사람됨도 조금은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도, 산문도 읽었고요. 그러나 그의 삶의 방식과 저의 마음속에 남긴 흔적이 저에게는 더 소중해서 그런지 신동문 시인이라는 호칭보다는 신동문 선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시나 산문이 그리운게 아니라 인간이 그리워서입니다. 사실 나이로 따지자면 여섯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는 훨씬 앞섰고, 훨씬 진솔하게 삶을 살았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그 삶의 모습에 그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김용환 교수께서는 신동문 시인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달리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고 했던 말씀에 주목하고 특히 ‘나’를 전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셨는데 ‘행동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산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굳이 옛날의 누군가의 사상에서만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오늘에 있고 오늘에 산다. 차라리 이런 명제는 어떨까? 나는 오늘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는 사유하는 인간이기 보다는 행동하는 인간으로 자기의 주체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요? 신동문의 시도 산문도 사유보다는 행동이, 현실 비판이기보다는 현실 참여에 몸과 마음과 넋을 쏟아 부었던 것 같습니다. 신동문 선배는 끌어오르는 열정을 시심(詩心)으로 정화시켜서 시를 쓰고 억제할 수 없는 비판과 저항의 투지를 산문으로 표출했으며 그것으로 현실보다 나은 새로운 현실을 이룩해보려는 삶을 한껏 살다가 나중에는 당장 눈앞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백성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의심(醫心)이 발동해서 침술을 익혀 그것으로 무료봉사하는 삶으로 바뀌는 차원전환이 있었습니다. 신동문 선배는 두 방향의 수도(修道)의 길을 진솔한 자세로 걸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시도(詩道), 다른 하나는 침도(針道)입니다. 신동문의 철학은 데카르트처럼 사유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밝히는 철학이 아닙니다. 그의 몸과 마음과 넋을 송두리째 쏟아 붓고 ‘시’를 체득해서 타자와 공감하는 도(=시도)와 ‘침’을 베풀어 남의 고통을 덜으려고 온 힘을 키우는 도(=침도)를 닦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시작(詩作)이나 침술(鍼術)이라는 표현에는 위화감을 느낍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신동문 선배가 마치 도인(道人)처럼 보입니다. 계량적 평가만으로는 많은 작품을 쓴 다른 시인들과 비교해서 빈약한 시인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시도와 침도를 닦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했느냐는 인간학적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동문 선배가 어째서 시 쓰는 일을 그만뒀는지에 대해서도 더 깊게 생각했으면 합니다. 단양농장에서 김판수씨에게 털어놓았다는 ‘그때는 실존이 우선이었다’는 말을 신중하게 되새김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과거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적이 있습니다. 데모하던 학생이 잡혀가서 존경하는 교수가 누구냐는 신문에 제 이름을 말한 것이 빌미가 돼 학생의 데모를 배후에서 조정했다는 혐의로 취조를 받았는데 사흘 밤낮이 지나니까 끝내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보다는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시급한 문제였습니다. 거기서 삶을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팽배했습니다. 거기서 그때까지의 삶을 통째로 되돌아보게 되고 아주 다른 새로운 삶의 모습을 그리게 되고, 그 삶을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가야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더라구요. 아마 짐작컨대 신동문 선배도 그런 심경이었지 않을까? 여기서 신동문 선배가 살아 있는 동안에 직접 만나고 그의 사람됨을 접했고, 그의 언행을 목격했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박 시인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얼마전에 박 시인께서 쓰셨던 글에서 깊은 인간적 공감을 느꼈기 때문에 박영수 선생께 박 시인을 꼭 모시고 말씀을 듣고 싶다고 청했거든요.”

 

김영희 시인

▷박정희 시인 “제가 10대 여고생 시절 신동문 선생님은 20대 청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 ‘청춘의 병든 계단’이라는 산문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 산문이 곧 신동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에 눈그늘이 깊은게 한국사람의 일반적인 얼굴과 다르게 서구적인 마스크였어요. 선생님이 입원해 있는 결핵병동은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여학생들로 빼곡했습니다. 앉을 자리도 많지 않아서 선생님이 누워 있는 침대까지 올라가 앉았어요. 미열이나 병에 의한 통증도 다 잊은 채 우리를 보면 환한 웃음을 지어주셨던 것이 기억이 나요. 첫사랑 이야기나 읽은 책 이야기,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문학 이야기 등을 많이 해주셨어요. 병자인 선생님에게서 새로운 문학의 향기를 찾았습니다. KBS라디오에 ‘환우의 시간’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거기서 선생님의 짤막한 글들이 전파를 탔어요. 선생님이 요양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를 하셨어요. 선생님의 기존 작품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 더 좋았어요. 그 작품이 바로 ‘청춘의 병든 계단’이에요. 저는 당시 선생님 안에 그 뜨거운 이성과 욕망의 어떤 것을 보게 됐어요. 저는 이후 서울로 진학하게 돼 청주를 떠나게 됐습니다. 서울에서 여운문학상에 당선됐을 때 선생님은 제게 따끔한 말도 해주셨어요. 초기 충북문학상을 탔을 때는 외래문화는 공부하더라도 우리 것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제가 실향민 세대라서 그런지 청주 사람이 아닌 떠돌이 정서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나요. 청주사람의 질 그릇, 청주의 풀냄새, 흙냄새, 무심천을 강조하셨어요.”

 

▷김 주간 “신동문 선배의 얼굴이 서구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같은 남자로 본 인상으로는 1950년대 한국 영화의 압도적인 남성상으로 군림했던 이민(李敏)의 창백하고 결핵환자를 연상시키면서 고뇌에 찬 지성미가 감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1950년대의 어김없는 한국적 남성상이었는데 아마도 남자와 여자의 보는 눈이 다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영수 수필가

▷박영수 수필가 “신동문 선생님은 꼭 부채를 들고 다니셨어요. 저에게 청주 사람 중 누가 제일 그립냐 하면 신동문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신동문 선생님은 청주에서 태어나 후배 양성에 몰두하셨던 진정한 청주사람이었어요. 진정한 청주인 다운 기질과 특성, 그리고 청주적 문화정체성을 가진 사람도 신동문 선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때 문학 동아리 학생들이 모인 ‘푸른문’이라는 문학동호회가 생겼어요. 그 때부터 우리들은 신동문 시인 같은 문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어요. 신동문 시인은 마치 선지자 같았어요. 제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신동문 선생님 덕분이고, 제가 수필을 쓰게 된 것도 선생님의 영향이에요. 청주 문단, 청주 문학사, 청주 문학의 선구자라고 생각해요. 신동문 선생이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셨는데 그 모습을 보며 청주에 살아도 그런 큰 대회에 당선될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청주 문인들의 응집력도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앞에는 나서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문인협회 결성 때도 앞에 나서지 않고 민병산 선생을 회장으로 밀었어요. 그가 청주에 있었기 때문에 청주 문학이 태동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척박한 청주 땅에서 청주 문학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문하생들도 많이 발굴했어요. 한국문단형성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신동문 선생을 저는 청주 문학의 선구자로 표현하고 싶어요. 청주인의 자존심도 높여줬죠. 매년 신동문 문학제가 열릴 때마나 이제는 추모사업이 아닌 선양사업으로 전개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요. 생가 공원, 평전 발간, 문학기행 코스 개발 등 사업도 활발히 진행됐으면 합니다. 요즘은 문인들이 신동문 청소년 문학관을 요청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가 ‘푸른문’ 동인에서 많은 문학 소년, 소녀들을 길러냈기 때문이에요. 신동문 청소년 문학상은 이미 있으니 이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동문 문학상을 만들 차례라고 생각해요. 2008년인가 조철호 동양일보 회장이 중심이 돼서 충북 출신 작고예술인들의 유품을 전시했었어요. 그때 아주 좋은 반응을 얻어서 인상에 깊게 남았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제 그 유품 보관이 잘 되지 않아 없어지기 시작했다는 거에요. 당시에도 그 유품들을 굉장히 어렵게 모았는데 아쉬워요. 이제는 충북 작고 문인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시설이 건립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청주 지역 문학 동호회인 ‘푸른문’ 회원들과 시낭송의 밤을 마친 뒤. 두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가 신동문 시인.

 

신동문의 시집 '풍선과 제3포복'.

▷김 주간 “제가 그리워하는 청주인은 청주에서 출생했다거나, 청주출신이라거나, 청주에서 오래 살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청주의 얼을 얼만큼 체득해서 그것을 삶속에서 얼마나 체현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신(開新=NOVA APERIO=새로운 차원·지평·세계를 열다)의 정신입니다. 제가 인생의 3분의 1, 약 30년을 바쳤던 충북대의 소재지가 개신동이었고 충북대의 건학정신이 개신이었으며, 거기서 몸과 마음과 넋을 다 쏟아서 펼치려 했던 것이 개신의 인문학이었습니다. 서울 중심의 학문이나 사상의 주류(主流)나 시류(時流)에는 따르지 않고 때로는 거스르면서 저 나름의 독자적인 삶과 배움을 젊은 세대와 공감·공진·공유함으로써 아름답고 살기 좋은 행복한 도시 청주를 만들고, 맑고 깨끗한 충청도를 이룩하고, 사람을 무엇보다도 귀히 여기는 한 나라가 되도록 하고 싶었고, 그 꿈이 국경을 넘어 세계와 함께 실현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류나 시류에 밀리고 부서지고 상처를 입게 돼 결국 고장과 나라를 떠나 이국에서 뜻을 펴볼 수 밖에 없어 오랫동안 정처없이 방황했습니다. 오히려 타국에서 많은 동지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뜻을 같이하는 고장사람이 그리웠습니다. 오랜만에 청주로 돌아와서 그동안 막연하게 그려오던 그리운 사람들을 그리운 청주인과 그리운 충북인과 그리운 한국인으로 나누어서 구체적으로 몇분씩 골라서 여러분과 함께 기리고 장래세대와도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의 터전을 마련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지난번에 민병산 선배를, 그리고 이번에는 신동문 선배를 그리운 청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배들에게서 생생한 개신의 얼을 체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인연=지연(地緣)보다는 청주가 철학과 예술과 문학이 새롭게 열리는 개신의 도시로 향상·발전·변혁되는데 음으로 양으로 적게 또는 크게 이바지하려는 뜻이 있느냐 없느냐로 진정한 청주인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진정한 청주인은 활짝열린 인간상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동문 선배의 시를 읽어보면 시정, 시감, 시율이 독특합니다. 신동문 선배의 시를 많은 대중이 알길 바라는 것은 작품에 담긴 영혼의 부르짖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신동문 선배는 참 훌륭한 문인과 시인, 소설가를 길러냈습니다. <김수영 평전>에서 제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신동문 사랑방’입니다. 그곳의 단골손님이 김수영, 유종호, 박재상, 고은, 이병주, 안동림, 이호철 등이었다고 하더군요. 당대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모두 모여 시를 논하고, 소설을 논하고, 문학과 인생을 논하고, 시대와 세상을 논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청주에서 ‘함철방’=함께 철학하는 사랑방을 열어 철학하는 시민들과 선배들을 기리고 현재의 당면과제들에 대응·대처·대결하고 미래를 함께 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동문 선배께서는 일찍이 그런 것을 실천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신동문 선배나 저 자신이나 함께 국토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를 살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6.25로 나라 땅과 겨레가 온통 폐허가 된데다 이데올로기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그다음에는 군부독재의 식민지적 상황을 겪었지만 신동문 선배는 저보다 훨씬 앞서서 훨씬 뜨겁게 시대의 흐름에 야멸차게 저항했었다고 생각됩니다. 온몸과 온 마음과 온 넋을 다해서 영혼의 탈 식민지화를 줄기차게 절규하면서 깜깜했던 시대에 한줄기 빛으로 밝혔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주어진 여건·조건·처지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과는 다른 곳에서 몸과 마음과 넋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해방 공간을 찾아 헤맸던 것 아니겠습니까? 영혼의 탈 식민지화가 이뤄지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영혼이 키워져야 자기도, 고장도, 나라도 제대로 설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신념인데 인간 신동문은 저보다 훨씬 앞서서 그 길을 걸어갔던 분이기에 그리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동문 선배는 그야말로 영혼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세계에서는 독재의 억압에 더 이상 의미있는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을 때 시와 산문을 통해서 현실을 비판하는 삶을 접고 병든 사람을 보듬어주는 침도의 길로 걸어가 생을 마쳤습니다. 시를 쓰고 문학 활동을 했던 시기와 침으로 병자를 돌본 시기가 그의 삶을 바쳤던 두 개의 기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동문 선배를 문학의 차원에 얽매는 것이 진정 그 사람을 기리는 일인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문학의 차원을 넘어서서 조금 더 넓은 차원에서 그 사람됨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몇몇 사람들은 48세 되던 해에 그때까지 쌓아올린 지위와 명성을 모두 버리고 병원을 세우고 1965년 사망할때까지 초지일관 헌신적인 의료봉사 활동을 계속 했던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음악가·의사·사상가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1875-1965)와 연결시켜서 ‘신바이쳐’라는 별명으로 그를 추모하고자 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어쨌던 저 자신은 신동문 선배를 시인이나 문인으로 만이 아니라 진실로 개신의 인문학을 몸소 살았던 청주인으로 기억하고 선양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귀한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박장미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