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 한희송(에른스트국제학교 교장)

인식론(epistomology)은 지식의 본질과 그 습득과정에 관한 철학적 사유(思惟)이다. 근대 교육제도의 인식론적 바탕은 경험론과 합리론이 차지하는 바가 크다. 영국의 베이컨에 의해 귀납적 추론을 더함으로서 근대의 경험론은 실험과 관찰을 통한 논리의 일반화를 모색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는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들에 대해 지식으로서의 위치를 주지 않는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완전한 근본원리들을 도출했다. 그리고 연역(演繹)적 추론을 통해 이 원리들로부터 지식의 가지들을 뻗어냈다. 이것이 합리론이다. 아직까지도 논리적 다툼의 연장선에 서있는 이 두 이론은 서로를 배제할 수 없는 운명을 나누며 지식역사의 발달과정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아직까지도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와 큰 관련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근대서양의 교육제도가 근간인 현재의 우리나라의 그것이 서양교육제도의 근본원리와 갖는 상관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근본적 이유는 경험론이 되었든 합리론이 되었든 그것들은 결국 논리적 과정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지식의 축적과 점수의 확보라는 학문의 실질과 형식적 평가를 분리한 뒤 후자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암기를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경험으로 격상시킨다고 해서 경험적 지식이 쌓여지지는 않는다. 또한 단순암기사항이 양적으로 크다고 해서 그것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반원칙을 먼저 확립한 뒤 사유를 통해 이와 관련이 있는 일들을 유추해 내는 합리론적 지식축적으로 변형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암기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지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연역적 또는 귀납적 방법들과 큰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근대교육의 기초로부터도 상관성을 외면당하고 있다. 여하한 노력을 통해 높은 점수를 얻은 학습자라도 지식의 세계와는 먼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층 간 유동성을 떨어트리고 사회계급을 고정화시킨다. 지금의 학습시스템에서 교육공급자는 교육당국이다. 그들이 학습내용과 그 학습방법까지 모두 독점한 채 자신들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학습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하는 현재의 체계는 당연히 학습자 중심의 추론과정을 무시할 수밖에 없다.
  영어학습을 예로 들어보자. 정상적인 중등교육을 받은 한국사람들은 ‘eye’가 ‘눈’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사람들은 이 단어를 외운 행위를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눈의 ‘흰자(the white of the eye)’ 또는 ‘눈동자(pupil)’ 정도의 기초적인 영어도 특별한 부가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알지 못한다. 학습자들의 노력이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eye'는 교과서에 나오고, 시험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에 아는 것이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지식과 학문은 남이 정해준 단어를 학습하는 곳에서는 그 발전의 기반조차 세울 수가 없다. 학습자 스스로의 연역적 그리고 귀납적 추론이 허용되는 정신적 공간에서만 지식은 그 최소한의 형태만이라도 갖추어 지기 때문이다. 어떤 학생이 ‘eye’라는 말을 배웠을 때 ‘그러면 눈동자는 영어로 뭘까? 눈물샘은 뭐라고 할까?’ 라는 질문이 스스로의 사고범위 내에서 생성될 때 그것이 지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오히려 ‘시험에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우리나라 미래의 지식적 건전성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을 수밖에 없다. 
  학습자 스스로가 사고할 수 없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암기는 지식으로부터 사람들을 오히려 멀어지게 한다. 인생에 있어서 배움의 황금시기에 있는 아이들 모두가 같은 구조의 교실에 의자라는 좁디좁은 물리적 공간에 강제로 묶인 채 스스로의 추론은 허용되지 않는 정신적 공간에 갇힌 상태에서 그들이 우리의 미래로 자라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 유리(遊離)된 공간에 앉아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수업의 내용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다만 무력감의 포로가 되어 가는 것은 어찌도 이렇게 쉽게 그들 스스로의 잘못으로 치부될 수 있는가? 무력해지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은 해당수업을 듣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 도대체 왜 이리도 당연한 일로 인식되고 있는가?
  역사의 발전에서 하나의 세대가 그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에 자율적으로 순응하지 못하면 그 다음 세대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는 자신들이 혁명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스스로의 변화를 스스로 이끌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변화의 방법과 절차를 아는 사람들 또한 시대마다 존재하는 법이다. 우리 시대가 모두 힘을 합쳐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추상적 추론과정을 경험하는 인격체로 대접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닫는 것이 교육혁명의 첫 단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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