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시인)

▲ 이석우(시인)

98주년 3.1절이 다가왔다. 잃었던 나라를 되찾은 성스러운 기념일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3.1운동 정신을 자기 진영논리로 확산시키려는 반역사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민족의 성일(聖日)에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의 세 대결로 얼룩진 부끄러운 수도 서울을 보게 될 판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당사자가 되어 손발을 놓고 언론은 정심을 잃고 갈팡질팡한다. 한국의 모든 지성은 눈을 감았는가. 이 혼란스런 현실이 너무 참담하다.
우리는 왜 98년 전에 나라를 잃었던 것인가. 권력을 쟁패하기 위해 정치가들이 국론을 분열시킴으로써 국력이 쇄진해진 것이 그 원인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정치인들이 앞 다투어 집회에 참석한다.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갈등을 극대화시키면서 자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3.1절 기념일만이라도 숙연하게 항일 투사들의 활동상황을 짚어보며 민족을 길항력을 열어 보아야할 것이 아닌가.
1908년 6월 10일 한봉수와 김규환은 6~7명의 의병과 함께 오근장에서 진천으로 향하는 10여리 지점인 문백면 옥성리에서 우편물을 이송 중이던 일본 헌병기마대의 상등병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하고 현금을 탈취하였다.
의병들은 인근의 보리밭에 매복해 있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거사를 성사시켰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시마자끼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순직비를 옥성리에 세웠다. 이때 죽은 말도 이곳 바위백이에 묻어 말무덤이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정부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1977년 한봉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이 성금을 모아 진천군?문백면 옥성리 547-2 비사리고개에 ‘의병장청주한공봉수항일의거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그 자리에 서있던 사마자키의 순국비가 의견을 분분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비를 분쇄하자는 쪽과 세워두고 후손들에게 일제 침탈의 그 세부를 교육시키자는 쪽의 이견이었다. 그 결과 시마자키의 비를 한봉수 의거비 발치로 끌어내려 세워두기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후손들이 현장을 찾았을 때, 당시 지배와 피지배의 대척점에 있던 두 사람의 위치를 전도시킴으로써 냉엄한 역사 심판과 그 정의의 결과를 한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의병장의 발치에 초라하게 서 있는 일본 헌병의 순직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의병활동에 대한 의로운 감회를 갖게 한다. 지역주민의 지혜로움이 교육적 의미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한봉수(1883∼1972) 의병장은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다녔는데 17살부터 동네에서 명사수 소리를 듣게 되었다. 1907년 대한 제국의 진위대가 해산되자 김규환(金奎煥)과 함께 의병활동을 시작한다. 그 해 8월에는 다시 고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의병대장으로 독립전쟁에 투신하게 되었다. 옥성리 사건을 시작으로 괴산 유목리, 미원, 낭성 가래올 등에서 전과를 크게 올린다. 전의, 목천, 평택, 장호원, 횡성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4년 6개월 동안 33회 승전을 기록한다. 그 행동이 너무 빨라 '번개대장'으로 불린 유격전의 명장이었다. 1909년 문경새재에서 적군 40여명의 정예부대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수의 열세에 밀려 장졸을 이끌고 속리산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의병의 마지막 전투가 되었다.
상하이로 망명할 계획을 가지고 1910년 5월 12일 귀순의사를 표시한 뒤 서울로 숨었으나, 5월 15일 남대문 역에서 충청북도 경찰부 소속 일본 순사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손병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건네받아 4월 1일 향리인 세교리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청주시 내덕동에서 청빈하게 살다가 1972년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