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 이현수(한국폴리텍대 청주캠퍼스 학장)

먹고 살기 지난해도 90% 이상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대학에 보내겠다는 사회. 고등교육에 대한 열망은 대기의 산소처럼 수용되고 사교육 시장은 비대해간다. 굳이 통계를 들이밀지 않아도 대다수의 고교졸업자들은 대학에 물밀 듯이 진학한다. 과잉이다. 4차 산업혁명 목전의 시대에 이건 아니다 싶다. 사회 전체가 빠른 속도로 변형되고 있는 오늘날,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 ’능력중심사회’는 사실 학력에 따른 능력주의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실무능력중심사회’가 되어야 대중적이며 현실적이다. 실무능력이 학력보다 상위가치인 사회가생산적인 사회이다. 돌아보면 능력주의는 압축 성장을 거친 한국 시장경제의 유일한 보편적 합의였다. 인권, 평등 등의 가치관이 들어설 틈도 없이 질풍노도로 성장한 우리 사회에서 ‘성장의 과실은 능력에 따라 나눈다’는 대원칙이 사회를 지탱하는 유일한 규칙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결과 학력이 능력이 되고 개인의 평가기준으로 규정당한 채 강고한 학벌구조가 형성됐다. 학벌구조를 깨려면 이 능력주의 가치관을 깨고 사회를 유지하는 다른 틀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실무능력중심사회’의 단초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융합적 요구에 마주칠 때마다 학벌의 위계가 아닌 실무능력이 가치기준이 되는 실용의 시대는 다가온다. 학력보다 기술을 택하고 열혈청춘을 내던진 인재를 교육하고 또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대학 또한 권위를 버리고 실용적 개혁을 요구받는다. 허나 산업과 사회와 인간의 변화에 대한 거시적 통찰은 간데없고, 고학력 실업자는 늘어가지만 대학도, 사회도 학력의 무소불위의 질서 앞에 순응하며 책임을 다하려 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 대학들은 교수채용에 있어 학위에 천착하고 학력에 고무 받는다. 그러면서 실무능력중심의 인재를 육성할 수 있겠는가. 4차 산업혁명의 오롯한 인류사적 흐름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4차 산업혁명의 조건 속에서 대학은 변화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대학 사회의 구성원들은 물론 사회 전체가 함께 ‘유의미한 지식은 어떤 것이며 필요한 인재와 이를 가르칠 이는 누구인가’라는 큰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 과정이 누락된 대학 변혁은 미래를 불안해하는 젊은이들에게 학력지상주의 막차에 승차를 강요하는 비즈니스의 이면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는 유토피아다. 저성장 시대인 지금, 안정적인 일자리는 창출하기도 어렵고, 그 일자리가 언제까지 안정적일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소위 ‘펜’굴려서 먹고 사는 직업이 아니면 인정받기 어려운 ‘사노공상’의 관성은 지금도 유효하다. 돈이 되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직업적 행복은 평가절하다. “그거 해서 먹고 살겠나”와 ‘알 만한 기업’을 다니느냐가 직업평가의 기준이다. 그 사람이 행복한지, 삶에 만족하는지는 그 누구도 물어보지 않는다.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알만한 대기업에 들어간다고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중소기업보다 덜하다지만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27%라는 통계는 적응의 문제가 아닌 만족의 수치이다. ‘직장’을 다닌다고 ‘직업’이 생기는 게 아니라는 나쁜 현실을 일찍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명문대에서만, 4년제 대학에서만 더 많은 교양을 쌓을 수 있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다. 이른바 명문대학을 나오는 것이 사회적 성공의 기본조건이고, ‘공시족’이 많은 대학의 현실은 비효율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일 뿐이다.
산업시대의 교육이 수직적, 논리적, 집단적 방식이라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은 기술의 융합에 의한 공감적 방식이다. 세상의 모든 기술들이 죄다 몸을 밑절미로 삼아 생성된다. 제 몸을 갈고 닦아 경지에 이른 장인들의 삶이 시대의 공감이며 참다운 기술교육이다. 그 속에서 한 분야의 숙련된 인간의 내공을 학생들은 자신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소통한다. 대학은 기성품이 아니라 튼실한 ‘원자재’를 제공하는 곳이다. 제아무리 기술이 드높아도 인문학적 감성과 융합하지 않으면 ‘쟁이’일뿐이다. 요즘처럼 오늘 배운 것이 내일이면 낡은 것이 되어가는 시대에 매력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틈새들이 우리 사회에는 더 많이 필요하다. 한국 폴리텍 대학은 견고한 학력의 틈새를 벌려서 ‘장인’의 넉넉한 품성과 실용기술을 우대한다. 신규교원의 대다수가 산업현장의 ‘장인’들이 태반이다. 더디지만 도도하게 걸어갈 ‘실무능력중심사회’를 위해 한국 폴리텍 대학 청주캠퍼스에서도 고졸출신 산업용 정밀기계설계분야 최고전문가를 겸임교수로 지난해 초빙했다. 학력보다 쓰임새 있는 기술로 진로를 택한 우리 학생들의 반응은 신명나다. 그분은 ‘실무능력중심사회’를 위한 마중물이시다. 대학들이여, 4차 산업혁명을 채비하고 싶거든 학력과 학위의 그 고단한 무게를 내려놓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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